2020년 8월 16일 성령강림후 11주
이사56:1, 6-7 / 시편 67 / 로마11:13-15, 29-32 / 마태15:21-28
오늘의 복음본문인 마태복음 15장 21절 이하에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에게는 몇 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은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한 언급이 없지마는, 우리들이 간혹 정신질환자들을 볼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사람인데, 머리칼은 산발을 하고, 얼굴은 귀신 같고, 때가 꾀죄죄한 옷을 입고, 신발은 언제 신어 봤는지 짐작도 못하겠고, 오랫동안 씻지를 않아서 온 몸에서 냄새가 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누가 말을 안 해 줘도 ‘귀신들린 사람’인 줄 알아 봅니다.
이제 한창 꽃같이 피어날 나이의 딸이 이런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고하면,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그런 딸을 둔 어머니라면, 어떻겠습니까? 속이 터지는 괴로움을 안고, 날이면 날마다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 다니며, 귀신에게서 자기 딸을 벗어나게 해 줄 사람 만나기를 일구월심 바랄 겁니다. 이 여인의 고향인 두로, 시돈이라는 도시들은, 근자에 아주 큰 폭발사고가 일어난 레바논의 베이루트에 이웃한 항구도시입니다. 거기 와서 살고 있던 가나안 여자라 했습니다. 가나안 여자란, 오늘날 ‘팔레스틴사람’이라고도 불리고, 그 옛날에는 인근 페니키아에까지 흩어져 살던 혼혈민족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의 유대인들의 관습으로는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저주 받은 백성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으로는, 그런 유대인혼혈족의 딸이 귀신이 들렸건 뭐가 들렸건, 비록 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소망이 없는 족속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나사렛 예수 선생님이 레바논에 오셨고, 그 분은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소문을 일찍이 들어 온 바가 있어서, 이번에 그 분을 만나서, 귀신 들린 자기 딸의 운명을 고쳐 봐야겠다는 소망이 마음에 꽉 차 있었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에워싸고 두로-시돈 지방을 걷고 계시는 주님을 만난 것은 어느 한낮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여자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까부터 외쳐 대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귀신 들린 내 딸, 귀신에게서 좀 벗어나게 해 주세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 메씨야, 곧 구세주가 태어나신다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구세주로 오신 분이시여’라고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수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에워싸고, 길을 메우고 지나가고 있었지만, 이 여자의 음성은 거의 발악적인 외침이었기 때문에 거기 있던 사람은 누구나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도 이 여자의 하소연을 벌써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음 속에 이 여인을 도와 주실 생각을 벌써 하시고 계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냥 두고 보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염려는 주님께서 그냥 지나가실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목청을 돋우어 더 큰 소리로 발악적으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여, 제 딸이 아주 흉악한 귀신이 들렸습니다. 좀 귀신 내쫓아 주세요.” 사람들이 이 여자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모두 귀청이 째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 아예 귀를 막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제자들이 주님께 말씀 드리기를, “저 여자가 아주 시끄럽게 떠드는데, 좀 청을 들어주고 그를 먼저 보내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부탁을 드릴 정도였습니다.
이윽고 제자들이 이 여인을 군중들의 틈바구니에서 꺼내어, 주님 앞에 서게 해 주었습니다. “네 딸에게서 귀신이 물러갈지어다” 하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게 안 하시고, 주님께서는 물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소란을 떠는 것이냐?” “예, 제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귀신 좀 쫓아내 보내 주세요. 주님.” 이렇게 두 손바닥을 빌면서 주님께 간곡하게 빌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보통 유대인들이면 다 하는 말을 했습니다. “자녀가 먹을 떡을 개들에게 주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다”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을 개 취급하던 유대인들이 흔히 가나안 사람들에게 대하는 말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좀 보십시오.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옳습니다. 하지만, 개들도 자기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개 취급을 해도 좋으니, 개가 주인의 밥상에서 흘린 부스러기를 주어먹듯이, 좀 부스러기 신세라도 좀 지게 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이 여인이 간절하게 부탁하는 음성을 들으면서, 왈칵 눈물이 솟아날 것 같은 느낌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이때 주님은 이 착하디 착한 가여운 여인을 향하여 선언하셨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의 믿음이 장하십니다. 당신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셨습니다.
그때 즉시로 이 여인의 딸이 나았다 했습니다. 이렇게 고쳐 주실 것이면, 처음부터 귀신을 빨리 쫓아내 주시면 되지, 뭐 그렇게 “가나안 사람들은 개”라는 말로 자존심에 상처를 줄 것까지 뭐 있냐고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 그것은 좋은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제가 대답을 해 드리려고, 오늘 이 이야기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겁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인류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물론 그냥 아무 말 없이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 대접하셨습니다. 자기 입으로 “주님,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구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병을 고치러 주님 앞에 왔을 때에, 구태여 그들에게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네가 병 고침을 받게 될 줄을 믿느냐?”
“네 믿음대로 되리라.”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렇게 계속 물으십니다. 그들의 입으로, “예, 제가 병 낫기를 바라나이다.” “주여, 주님께서 제 병을 고쳐 주실 뜻만 있으시다면, 제 병은 곧 고침을 받게 될 줄을 믿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제 하인이 곧 낫겠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언사를 듣고 싶어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주로 아침에 조반을 지으시던 제 어머니께서 저에게 가게에 가서 두부를 사 오라는 심부름을 자주 시키셨습니다. 저는 잔돈 얼마와 알루미늄 그릇을 들고 가게로 가곤 했습니다. 가게에 도착하면, 저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종알 거렸습니다. 그러면 가게 아주머니는 “못 들었어, 더 크게 말해 봐” 했습니다. 맨날 가서 두부 밖에 안 사는 내가 뭘 달라는지는 알만 한데 날보고 큰 소리로 말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종내 큰 소리로, “두부 한 모 사러 왔어요.” 외칠 때에야 그 가게 주인 아주머니는 두부도 주시고, 유리로 된 큰 ‘말누깔 사탕’ 그릇에서 밤알 만한 드롭프스를 하나 집어 제 입에 넣어 주셨습니다. 결국 저는 처음부터 큰 소리로, “두부 한 모 사러 왔어요” 하게 되었고, 그러면 공식적으로 말누깔 드롭프스를 받아 먹곤 했습니다. 저는 자라나면서 그 가게 주인 덕분에, 어디를 가든 제 용무를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 가게 주인은 제게 아주 중요한 습관 하나를 길들여 주셨습니다. 고마우신 분입니다.
결혼식 때에는 “아무개여, 그대는 아무개를 아내로 삼아, 사랑하고, 보살피고, 존경하며, 평생토록 성실하게 살아가겠습니까?” 집전자가 그렇게 물으면, 신랑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합니다. 이때에, “아, 그러려고 오늘 결혼식 하겠다고 나온 거 아닙니까?” 그러는 사람 저는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자기 입으로 결혼의 의사를 분명히 해야 결혼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얌전한 신부도 자기 입으로 결혼의 의사를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결혼식은 더 진행이 안 됩니다. 물론 알지요. 결혼식 하겠다고 드레스 입고 곱게 화장하고, 부케를 들도 나왔으면 결혼하겠다고 나온 거 모를 사람 없지요. 하지만 집전자는 묻는 것입니다. 사랑하냐고, 평화롭게 잘 살겠냐고, 묻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인격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길에서 몇 번이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 이 말을 몇 번이나 했을 것 같습니까? 두 번? 열 번? 아닙니다. 백 번도 더 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애를 태우게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믿음을 키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을 한껏 키워 주셔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가나안 여인은 자기 자신에게도 믿음을 확인시키고 있었고, 그 믿음을 사람들 앞에서 ‘객관화’했습니다. 믿음을 만인 앞에 선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여인이 중도에 포기하면 어쩌나 하면서도, 그 여인의 마음에 끈질긴 믿음을 키워 주셨고, 그 믿음을 만천하에 공개하게 하셨습니다. 믿음에는 사회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자꾸 말을 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믿음이, 이 요지부동인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되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외치는 우리들의 음성으로 복음을 몰랐던 우리 이웃이 복음을 듣게 되고, 믿음 없는 이 세상은 점차로 믿음이 있는 세상으로 바뀌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