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3일 성령강림후 12주
- 이사51:1-6, 시편 138, 로마11:33-36, 마태16:13-20
제자 베드로는 둘러 앉은 다른 제자들 틈바구니에서 주님을 향해서 엄숙한 선언을 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입니다.” 이것은 주님과 베드로에게는 직접 와 닿는 신앙고백이었지만, 오늘날 저 같은 사람에게는 무슨 말인지 대뜸 이해가 되지 않는 고백문입니다. 다른 나라의 2천년 전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백의 뜻은 “당신은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요, 살아계신 하느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뜻입니다.
제 할머니는 가끔 동백기름을 머리에 바르셨습니다. 제 아버지는 매일 ‘포마드’라는 머리 기름을 바르고 머리를 빗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모양내는 기름을 바르셨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왕이나, 제사장이나, 예언자를 세우실 때마다, 하느님의 대리자들을 시켜서, 그들의 머리에 기름 붓는 행사를 가졌던 습관을 따라, 예수님도 하느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보내신 분이라는 뜻으로 이런 신앙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고백을 그의 신앙의 핵심으로 주님 앞에 말했을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의 터전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이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세례식의 조건을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독교 2천 년을 지속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이 신앙고백문 만큼 정확하게 표현한 고백문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더 이해가 쉽고, 더 마음에 와 닿는 신앙고백문을 왜 작성할 수 없느냐 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말고도, 여러 개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신앙고백(마니피캇트, 루가1:46-55)을 봅시다. 이 고백은, 마리아가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을 당시, 그의 뱃속에 예수님을 품고 있을 때,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찬양하는 노래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대단한 노래입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이루실는지 내다보고 부른 노래입니다.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며,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시고, 부자는 빈 손으로 돌려보낸다” 했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가난한 자들, 짓밟히는 자들, 별 볼일 없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에 이 세상에 큰 변혁을 가져 오실 분, 다른 말로 하자면 ‘천지개벽’을 일으키실 주인공을 자신의 몸 안에 모신 이로서, 범상치 않은 신앙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저자가 아주 신념 있게 우리에게 전해 주는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히4:14)이라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 대제사장은 사람(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은 로마 총독이 임명했습니다)들이 세운 대제사장이 아니고, 역사의 절정에 하느님께서 친히 세우신 대제사장이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양이나 소가 아닌, 자신을 제물로 삼으셔서,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대속의 제물이 되셨다고 선언합니다(히:9:6-8). 제사종교를 지닌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위상을 알아 듣기 쉽게 설명한 표현이었습니다. 그가 단 한 번 드린 제사, 곧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드렸던 ‘제사’로 다시는 죄를 용서 받으려고 제사를 드려야 할 일이 없게 되었다(히10:10)고 말했습니다. 이 신앙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이 되었고, 비록 베드로의 신앙고백문에는 이런 글귀가 없지마는, 이에 못지 않은 권위 있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으로 첨부되었습니다.
바울의 신앙고백은 그의 서신들 여러 곳에 퍼져 있지만, 가장 집중적으로 자신의 신앙고백을 뭉쳐 놓은 곳이 빌립보 2장 5-11절입니다. 제목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 붙였습니다마는 실상 ‘바울의 기독론’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래 본체가 하느님이시나, 하느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느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6-9절)
빌립보 2:5-11
‘속죄’와 ‘은총’에 관심이 많았던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들을 기록하면서 기독론을 속죄-은총에 초점을 맞추고 기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속죄-은총론을 설명하기가 바빠서 따로 기독론(예수론)을 설명할 기회를 항상 미루고 있었습니다.
복음서 가운데도 요한복음은 기독론을 위한 충분한 자료를 공급하려고 애썼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별명이 100여 가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령, 그분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시라고 소개한다든지, 만물의 존재 근거인 ‘로고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라고 본다든지, 대속의 제물이 되신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도 있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든지, 구원의 양식인 ‘위로부터 내리신 떡’, 등 제1세기 신앙고백에서 나왔던 수많은 메타포(비유적 언어)를 모두 소개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 자신의 신앙고백을 듣고 싶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을 육신으로 만났던 분들은 그들이 만났던 주님의 경험을 토대로 그들 나름의 신앙고백을 했다고 칩시다. 하지만 비록 육신으로 만날 수는 없어도, 우리들의 생애의 한 지점에서, 인격적으로 만났던 주님 때문에, 내 삶의 목표가 변하고, 내 가치관이 변하고, 내 희로애락의 기준이 달라졌던 그 날의 경험을 되새기면서, 주님을 향해, “주님은 나의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나의 신앙고백이 성경에 나타난 신앙고백과 동떨어진 고백이 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요. 주님이 나의 생의 근거와 목표가 되시고, 나의 생의 기쁨과 보람이며, 나의 생의 영원한 모델이시라는 표현에서 떠나지 않는 한, 성경의 전통을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던 로마병정들의 지휘관인 백부장의 신앙고백을 읽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상관의 명령을 따라, 어떤 사형수인지 몰랐던 나사렛 청년 하나를 십자가 형에 처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또 그를 따라왔던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 그의 죽음을 에워사고 천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바라보며, 자신도 준비하지 않았던 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아, 이 분이야말로 하느님이 아드님이셨구나!”(마태27:54) “아, 이 분이야말로 의인이었구나!”(누가23:47)라고. 어떻습니까? 로마백부장도 말할 수 있었던 ‘예수관(觀)’을 우리가 왜 말할 수 없습니까? ‘예수’라는 분이 당신의 생애에서 어떤 존재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