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30일 연중22주일 (성령강림후13주)
- 예레15:15-21, 시편 26:1-8, 로마 12:1-8, 마태 16:21-27
원종수씨라는 한국인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의사로 이름난 것보다, 교회를 두루 다니며 간증을 많이 하기로 이름난 사람입니다. 그의 간증을 듣고 믿음을 회복한 분들이 많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젊었을 적에 미국으로 유학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택시 기사에게 어느 교회로 가자고 부탁을 했습니다. 아마 거기서 누구를 만나서 안내를 받도록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택시 기사가 원씨에게 묻더랍니다. 기독교 신자시냐고요. 그래서 예 그렇다고 대답을 했는데, 다시 묻는 질문이 그의 심장에 꽂혔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Are you a real Christian?” 즉, 당신 진짜 기독교인이냐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너무 당황스런 질문이어서, 그냥 대체로 대답을 하고, 그 자리를 모면했는데, 그 후에 미국서 공부하는데, 자꾸만 그 택시 기사의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자기는 어머니 등에 업혀 매일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다니며 자라났고, 주일학교도 빠지는 일이 없었으며, 그래서 젊은 날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별 일탈(逸脫)이 없이 보내고 있는데, 자기더러 “진짜 크리스챤이요?” 하고 묻는 것이 뭔가 두려운 마음마저 들더랍니다. 그래서 하루는 평소처럼 교민(僑民) 교회 새벽기도회에 가서 기도하는 중에 하느님께서 대답을 주셨답니다. “나(하느님)를 사랑하는 자가 크리스챤이다” 이런 대답을 얻고서 안심했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살기만 하면 ‘리얼 크리스챤’(진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이런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베드로 만한 크리스챤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도 기독교인으로서 완전히 낙제 점수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 가셔서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시달리다가, 죽음을 당하게 되실 것이라는 예언을 하실 때였습니다. ‘의리의 사나이’ 베드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런 일을 당하시면 안 됩니다.” 정말 의리의 사나이답게 그렇게 말할 때였습니다. 호랑이가 나타난 듯, 큰 벽력(霹靂)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노하신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누구에게도 그런 야단을 맞아본 일이 없습니다. 부모님께도, 동네 어른들에게도 듣지 못한 야단을 맞았던 것입니다. 평소에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베드로가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했으며, 주님의 앞 치레라면 베드로가 누구보다 알뜰하게 보아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탄아, 물러가라”니, 이게 웬 봉변(逢變)입니까? 한 순간 베드로는 “주님께서 날 더러 사탄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나?” 아마도 다른 사람 향해 말씀하시는 것이겠지,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첫째 이유
그러나, 오늘의 본문을 들여다 보면, 베드로가 실패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의 입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이렇게 방금 신앙고백을 해 놓고서도, 그리스도, 곧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이 세상에 무엇 하러 오셨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씨야, 곧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치유하시기 위해서 대속제물(代贖祭物)이 되셔야 함을 수없이 주님께로부터 들었으면서도 그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을 또 하신다”고 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면으로 “그런 말씀 그만 하세요.” 라는 뜻과 다름 없는 이야기,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런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베드로를 그냥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숙어(熟語)가 수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숙어가 왜 그렇게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곧잘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뭔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기적을 보려 한다든지, 또는 병든 사람들이 병을 낫게 된다든지 이런 관심 만을 가지고 접근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호칭이 그토록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자마자 ‘나사렛 예수는 메씨야(희랍어로 ‘그리스도’)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태는 급진전되어, 예수께서는 어서 속히 메씨야로서의 대속의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고, 세상권력자들은 어떻게든 빨리 예수를 죽이자고 모의하던 때에, 자타가 ‘주님의 으뜸제자’라고 일컫는 베드로가 메씨야이신 주님의 입장을 그렇게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주님을 진노하시게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둘째 이유
본문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가 꾸중을 들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발견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놀라우신 예언, 즉 부활의 예언을 들었는지 먹었는지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시끄러운 곳에서라도 “우리 결혼합시다.” 이런 말을 했다면, 그냥 지나칠 수가 있습니까? 세상에서 들어볼 수 있는 말 가운데 가장 반갑고도 행복한 음성으로 들을 것 아닙니까? 물론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에 베드로가 그런 말씀을 자주 듣는 것이 인간적으로 아마도 싫었을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왜,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죽으면서 그 일을 해야 하겠다면, 자기가 죽든 다른 사람이 죽든 죽는 일을 기쁘게 들을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다음 말이 베드로의 귀에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그의 귀에는 그냥 유행가 가사로만 들렸던 것입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이런 유행가 가사로 들렸단 말입니다. 어떻게 부활이란 말이 유행가 가사로 들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주님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두 번째 이유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음을 당하셔야 했고, 우리 인간과 화해하시기 위해서 죽음의 세계에서 다시 부활하셔서 천상에 오르셔서 우리들의 주님이 되신다는 것은 유행가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대사건이었고, 하느님께서 이루신 역사 가운데 가장 크신 업적이셨습니다.
진짜 크리스챤
주님을 의리로 따를 수는 없는 분입니다. 내 부모가 기독교신자였기 때문에 나도 기독교를 믿는 것이다 라든지, 친구가 너무도 졸라 대서 기독교에 나오게 되었다든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어떤 동기로 내가 기독교인의 반열에 끼이게 되었든 간에, 내가 주님을 내 인격으로 만나고, 내가 주님을 내 주님으로 고백하고,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 내 일생을 좌우하는 나의 갈 길이 될 때 만이, 주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