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6일 연중23주일 (성령강림후14주)
- 에제33:7-11, 시편119:41-48, 로마12:9-21 마태18:15-20
오늘 본문들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오늘의 말씀 드릴 성서묵상의 제목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복음서(마태) 18장 20절에 나오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요즈음 이 구절이 코로나-19 때문에, 모임을 생명으로 하고 있는 교회들을 향해서, 특별히 한국교회를 향해서 ‘좀 모이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권유를 하려고 심지어 정치인들까지 인용하고 나서는 바람에, 이 성구가 유명해졌습니다. 제가 이 본문을 오늘의 말씀 제목으로 삼으려는 것은, 그들 정치인들의 취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작지만 소중한
“두 세 사람”이 모였다는 것은, 남 보기에 그리 중요한 모임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만난 모임이라면, 그 모임은 대단히 중요한 모임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가령, 성경에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자벳을 만나서 여러 날을 함께 보낸 이야기가 나옵니다(누가1:39 이하). 두 여인은 모두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한 분은 예수님을 품고 있었고, 한 분은 세례 요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두 여인이 찬송과 기도로 여러 날을 함께 지내면서 나눈 이야기는 ‘임신 오조’라든가 ‘해산의 진통’ 이런 화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권세 있는 자를 높은 자리에서 내치고 비천한 자를 높이는” 인류역사에 천지개벽을 꿈꾸는 예배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1절 이하에는 또 하나의 작은 예배가 소개됩니다. 거기 보면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 새 사람 ‘바울’이 되어, 주님의 사람 아나니아를 만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두 분의 만남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받을 텐데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뭐 그런 화제로 만난 것일까요? 아니지요. 하느님께서 장차 바울의 순종을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시려는 것일까를 함께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나니아는 바울의 잃었던 시력을 회복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껏 율법주의에 집중했던 바울의 잘못된 진로를 180도 돌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죄 사하시는 복음의 은총을 세상이 알게 하는 일에 그의 남은 생애를 온통 기울여 바치도록 인도한 것입니다. 그들이 만난 잠간 사이의 몇 시간은, 전적으로 ‘부활하사 승천하신 예수님’을 모신 자리였습니다. 예배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또 하나의 만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근무하던 로마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어부 출신인 베드로와 로마제국의 직업군인인 고넬료가 나눌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겉으로 보아서는 서로 나눌 화제가 있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열띤 것이었고, 그 대화는 이윽고 고넬료의 온 집안이 함께 세례를 받게 되는 큰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이티오피아 내시 간다케의 세례(행8:26이하) 사건과 함께,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로 있었던 이방인들의 회심과 이에 따른 세례의 사건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예배는 한가한 모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구원역사의 연속선상에서, 우리들의 예배는 한 영혼, 한 영혼이 구원 받는 엄숙한 사건의 연속으로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사건들인 것입니다. 비록 대도시의 모모한 대형교회가 아니더라도, 저 산골 두메, 저 외딴 섬에서도, 주일 만이 아니고 어느 때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는 언제든 일어나고 있는, 인류의 역사를 뒤집는 새로운 사건들인 것입니다. 제1세기는 주님의 메씨야 사역에 이어서, 제1대, 2대 사도들이 활약한 무대였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박해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도 200년 동안 박해는 그치지 않고 계속됩니다. 그래서 ‘카타콤’이라는 유명한 지하교회는 제4세기 초에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숨어서 예배를 드렸던 유적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교회가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들이었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는 아직 ‘두 세 사람이 모일 수 밖에 없는, 탄압 아래에 있는 교회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숫자로는 미약하지만 어느 곳에서든 이 세상을 복음으로 뒤집어 엎으려는 거룩한 야심으로, 이들 미니교회들은 가슴 벅차게 그들의 예배를 시간 있는대로 드리고 있습니다. 광대한 무슬림 지역에서도, 힌두 지역에서도, 지배종교가 불교인 지역에서도, 특별히 공산권 국가 속에서도, 남의 눈에 들킬세라 숨어서 예배를 드리는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의 예배들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순전(純全)한 복음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 때, 공산권-무슬림 지역에 가서, 말 그대로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두 명 중 한 분은 학교 교사로 그 지방에 파견되어 가서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또 한 분은 그 지역 청년으로 그 교사에게 복음을 듣고 회심한 분이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진정 신앙의 역사를 뒤집는 예배로 보였습니다. 단 두 명인데 말입니다. 복음화를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는 결단을, 그들의 예배에서 하느님 앞에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서비스
제가 태어난 한국이라는 나라로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소위 ‘자유 민주’를 근간으로 하는 정치체제의 나라요 경제적으로도 많이 부강해진 나라입니다. 자유가 있고, 윤택한 살림이 있는 나라의 모양새는 갖추었지만, 저희 국민들이 향유하고 있는 자유와 번영 때문에 저희는 결과적으로 세속주의에 깊이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편의주의로 흘러가고, 성장주의, 실적주의로 가는 교회가 되어, ‘첫 사랑을 버린 교회’(계시록2:4)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목회자가 교회 일을 기업체처럼 세습하고, 강단에서 죄, 회개, 십자가를 말하기를 조심스러워 더듬는 교회, 하느님의 영광이 떠난(삼상4:21)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세속주의로 가는 기독교의 현상은 벌써 미국, 영국, 독일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한국은 그들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세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절반은 무슬림, 힌두교, 불교, 공산주의 때문에 “두 세 명의 교회”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지만, 나머지 절반도 역시 세속주의 때문에 “두 세 명의 교회”가 주류를 이룰 운명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오늘날 세계 모든 교회로 하여금 ‘미니교회’(2, 3 – 7, 8명의 교회)로 변모하도록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 ‘코로나’ 여파로 보입니다. 교회들로 하여금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히10:25)가 아니고, “모이기를 두려워하는 교회”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영원히 교회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 교회로 존속하면서 그 기능을 다할 것입니다.
교회는 두 가지의 ‘서비스’(service)를 하는 기구입니다. 영어로 서비스의 한 가지 의미는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예배 드리려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깨닫도록 마련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 속에는 간증이 있고, 찬송이 있고, 설교가 있고, 기도가 있고, ‘제자들의 재파송 예식’(성찬식)이 있습니다. 아무리 ‘미니교회’라 할지라도 어떤 형식으로든지 이 모든 요소들을 예배는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서비스는, 예배가 끝나고 다음 예배에 나아갈 때까지 온 회중이 곳곳에 흩어져서 자신의 삶으로 이웃을 섬기며 사는 서비스(봉사)입니다. 전자의 서비스는 이 두 번째 서비스를 위해서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두 개의 서비스는 마치 사람이 오른 발 왼 발을 서로 번갈아 짚으며 걸어가듯이, 우리 교회에 의해서 계속되는 한, 교회는 지금 이곳에 살아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으뜸 되는 계명으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께서, 교회를 향해 품고 계신 가장 간곡한 당부인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