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3일 연중24주일 (성령강림후15주)
- 시락27:30-28:7, 시편103:8-13, 로마14:5-12, 마태18:21-35
제가 어느 교회에서 목회하던 때의 일입니다. 연로한 여신도 한 분이 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임종기도를 하려고 그 분의 댁으로 서둘러 갔습니다. 온 가족이 모여 있었습니다. 저는 임종기도 후에 반드시 모든 가족들이 별세하시는 분과 최후의 인사를 나누도록 시간을 마련합니다. 한 분, 한 분이 별세하는 분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특별히 용서할 일이 있거나, 용서 받을 일이 있으면, 서로 용서를 주고 받으면 좋겠다고 모두에게 간곡히 요청합니다. 저는 마태오복음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태 16:19
그때 운명을 앞둔 그 여신도가 제게 말했습니다. “두 며느리는 내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내가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x들은 용서하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든 가족들이 마지막 인사를 마친 후, 저는 마지막으로 며느리 두 사람도 들어가 용서를 빌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문 바깥에서도 들을 수 있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가라카이, 흙이 내 눈에 들어가도 느그들은 용서 안 한다 했잖나”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잘못을 그리 크게 저질렀기에 임종 때에 이르러서도 용서 못하겠다고 고집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인생이 사후에 하느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에 어떤 형식으로 심판을 받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심판은 퍽 간단할 것이라고 봅니다. 1초도 안 걸리리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있는 영혼은 기구처럼 위로 뜰 것이고, 믿음이 없는 영혼은 가라앉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생각은, 그가 땅에서 풀었으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고, 땅에서 맨 채로 두었으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지 않겠습니까? 말씀대로요?
마태복음 18장 15절 이하에 보면, 교우가 죄를 범했으면, 혼자 만나서 조용히 권고하라(15절) 하였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두 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권면하라(16절) 했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회중 앞에 말하라(17절상)고 했으며,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17절하), 즉 교우가 아닌 사람으로 여기라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범법자, 즉 죄를 범한 사람을 치리(治理)하는 방법으로 일러 주신 말씀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말씀하신 대로, 처음에는 혼자서, 후에는 두 세 명의 증인들을 동원해서, 나중에는 회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리고는 출교하는 제도적 양식으로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교우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어떻게 그를 용서받게 할 것인가에 관한 기준으로 저는 봅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 이하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지고 않고, 회개하려 하지 않으므로, 제자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주님께 여쭙기를,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사마리아사람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렇게 말씀 드렸을 때에 주님의 반응이 “꾸짖으셨다”(55절)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대단히 격노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죄인인 너희가, 다른 죄인을 심판하겠다는 것이냐, 이렇게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큰 가정은 첫 사람 아담 하와가 배반함으로 지금껏 흩어진 가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그 깨어진 가정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회복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주를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구원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흩어진 가정을 회복하시고자 길을 여신 것입니다. 인간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대속의 제물로 하늘로부터 친히 내리신 하느님이심을 믿기만 하면 용서함을 받고 하느님의 가정으로 회복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왕에게서 1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있었다 했습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해 보면, 적게는 8조원(7천 5백 억 엔) 내지 17조 원(1조 6천억 엔)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렇게 큰 돈을 남에게 빚으로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아무리 대재벌이라 해도 그렇게 큰 돈을 빌릴 사람도 없고, 또 빌려 줄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므로 스케일부터 크십니다. 그런 빚을 빌린 사람이 약속기일이 되었는데도 갚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갚을 능력이 없는 것을 안 왕은 그냥 탕감해 주고 말았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돈을 탕감해 줄 사람이 인간 사회에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돈으로 그 값을 따질 수는 없어도, 만약 돈으로 계산하자고 해도 아마 8조 원보다 더 비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같이 큰 돈을 탕감 받은 자가 궁을 벗어나가자 마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난 겁니다. 백 데나리온은 한화로 1천 만원(9십 만 엔) 정도 됩니다.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당장 빚을 갚으라”면서, 그를 경찰서로 데리고 가서 유치장에다 넣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왕이 노발대발 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장 그 고약한 놈을 붙들어 오라” 했습니다. 그가 붙잡혀 왔을 때에 왕은 말하기를, “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그 엄청난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하고는, 볼기를 쳐, 옥에 가두었다는 비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로부터 거의 무한대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일은, 우리들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 뿐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법조문으로 주신 말씀이 아니라, 그것이 용서받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하기 힘든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 첫째는 두 사람 사이에 욕심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욕심으로 상충되어 있는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서로는 세월이 지날수록 서로의 원한이 깊어갈 뿐입니다.
- 두 번째 이유는 상대방이 내 약점을 쥐고 놓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갔던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크게 출세를 했는데, 그를 노예로 팔아 먹었던 형들이 양식을 사러 찾아 왔던 때에 그 원한을 갚으려고, 그의 형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노예가 되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형들의 과거로 형들의 앞날을 옥죄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집안이 이 기근의 운명에서 건져 내시려고 이 부족한 동생을 먼저 이집트로 보내신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형들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으로 하여금 가장 위대한 성서인물이 되게 한 이유였습니다.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 아드님의 매 맞음을 통해서, 그 아드님의 피 흘리심을 통해서, 그 아드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수난을 통해서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할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용서하는 일로 충만해야 할 것이고, 용서하는 일로만 매진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한없이 용서함으로 이 세상은 점점 더 용서를 크게 배우게 될 것이고, 온 세상은 용서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평화의 비전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에게서 배우는 세상 사는 참 비결인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