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0일 연중25주일 (성령강림후16주일)
- 요나3:10-4:11, 시편145:8-13, 필립1:21-28a, 마태20:1-16
주님께서 오늘의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서두에 하신 말씀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는 — 주인과 같으니 — “ 이렇게 ‘천국’을 설명하시려고 오늘의 비유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가 ‘천국’을 설명하시는 말씀인 것을 대전제로 하고 이 비유를 읽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많은 오해를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처음부터 다 읽고 나면, 천국, 곧 여기서 하느님의 포도원은 전혀 능률이 필요 없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아침 여섯 시부터 품꾼의 수를 충분히 모아 들였으면, 그들이 하루 종일 열 두 시간을 일해서 성과가 꽤 많았을 텐데, 왜 오전 아홉 시, 정오, 그리고 오후 세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에도 인력시장에 나가서 한 시간 밖에 일을 안 할 사람까지 데려다가 하루 품삯을 주고 일을 시켰느냐 말이지요. 그렇게 혀를 차며, 비능률적인 포도원 주인의 처사를 비난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애당초 하느님의 나라에는 능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유를 지으신 하느님께서 품꾼이 없어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하실 수가 있는 분 아닙니까? 다만 하느님의 크신 은혜로, 우리들을 주님의 포도원에서 섬길 수 있게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능숙하게 잘 하든, 또는 그렇게 못 하든 상관없이, 주님의 기대에 맞게 일을 하든, 그렇지 못 하든 상관없이 주님께서 우리들을 불러 주셨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의 포도원에서 즐겁게 일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침 여섯 시에 불러 주셨어도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고, 저녁이 다 된 시간, 즉 오후 다섯 시에 불러 주셨어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포도원에서 즐겁게 일합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동족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하여 일을 하기 시작하던 때의 나이가 여든 살이라 했습니다.(출7:7) 아마도 옛날 사람들은 나이를 한 해에 두 번 씩 셌었나,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그런 것 아닙니다. 아마 모세가 그 때 마흔 정도 났었다고 하면 아마 수긍을 할 사람이 많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이 팔십 정도는 돼야 사리를 바로 분별해서, 지도자가 될 소양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연세가 팔 십이신 분들은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부르심이 어디에서 무슨 일로 부르시는가 주의 깊게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팔십부터”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원에는 일이 많습니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 포도원을 경영하는 분들은 연중 수고가 많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눈이 다 녹기도 전에 우선 전지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은 포도 농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포도나무에 꽃이 피고 지면서, 봉지로 어린 포도열매를 감싸 주는 일이 또 큰 일입니다. 일일이 손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단한 작업량이지요. 그리고는 계속해서 달려드는 크고 작은 벌레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농약을 주는 일, 태풍에 낙과가 될세라 걱정도 많고, 일도 많습니다.
포도원에 품꾼이 필요했다고 하면 어느 계절인지는 불분명해도, 어느 계절이건 간에 포도원에 일꾼이 필요했다는 말씀은 수긍이 가는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읽으면서, 하늘 나라에도 일꾼이 필요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른 나이에 부르심을 받아 하늘 나라의 유익한 일꾼으로 살자고 이 비유를 이해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하늘 나라에 일꾼이 필요해서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아침 여섯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인력시장에 들락거린 포도원 주인의 안타까운 심정은 어째서였던가 되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이 비유를 읽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하느님의 포도원으로 와 다오,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영어권 나라에 “Never too late to repent.”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번역을 해 본다면, “회개하는 일은 언제 하든 결코 너무 늦었다고 말할 수 없다.” 또는 “지금이라도 회개해라, 결코 회개하기에 늦은 때는 없다.” 이런 격려의 속담인 것입니다. 기독교권에서나 나올 수 있는 속담이지요. 이것이 이 ‘포도원 품꾼 비유’의 진의라고 저는 믿습니다. 회개하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집 나갔던 탕자가 자기 죄를 깨닫고 용서를 빌러 집으로 돌아오듯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젠 믿을 만한 신실한 아들 딸로 살지 않겠습니까? 일을 잘 하건 못 하건 그건 문제가 아니지요. 포도원 일만 하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아버지 하느님 집의 일이라면, 그의손이 안 가는 곳 없이 성심껏 일을 할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입니까? 이렇게 죽을 때까지 한 50년을 일하면 어떻고, 한 30년을 일하면 어떻고, 1년 밖에 일을 못하면 어떻습니까? 그는 영원한 아버지 집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요나서를 제1독서로 오늘 읽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요나서 본문에보면, 요나가 하느님께 불평하는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요나는 복음 전도자로 니느웨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이 니느웨 성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멸망시킬 것이라”고 말씀을 전합니다. 이 말씀으로 니느웨 사람들은 깨우침을 받고,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요나가 기뻐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나는 아주 심술이 나서 불평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하느님, 저는 기분이 아주 나쁩니다. 그들이 왜 회개하는 거에요. 죄 값으로 멸망을 당해야 마땅한 자들이 왜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거에요. 아주 기분 나쁩니다.”
이게 복음 전도자의 바른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까? 비록 전도자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심정을 모른 채, 헛소리를 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헛소리를 뇌까리는 요나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한 신비한 경험을 하게 합니다: 즉, 니느웨가 장차 어떻게 되는가를 보게 하시려고 요나를 산 등성이에 오르게 합니다. 태양 볕이 내려 쪼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잎이 넓은 아주까리가 돋아나게 하셨습니다. 아주까리는 요나에게 시원한 그늘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벌레 한 마리가 아주까리로 기어 오르더니 그 잎을 다 갉아 먹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햇볕이 다시 뜨겁게 내려쪼였습니다. 요나는 다시 신경질을 냈습니다. “아이구, 주님 더워서 못 견디겠습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 주세요.” 이때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아주까리가 자라는 데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가 밤 사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토록 아까와 하느냐?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 이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
우리가 지금껏 사는 것은 다 하느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게 된 것도, 우리들의 양심이 남보다 맑아서가 아니고, 남보다 착해서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너그러우심,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지금껏 인도해 오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다 우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여 하느님의 나라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느님의 인자무한하신 은혜의 증거들입니다. 어느 시점에 부르심을 받았건 그건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회개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와,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됐는가 못 됐는가 만이 문제인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교적부에 이름이 올라 있었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된 하느님 나라 식구로 살아가는 일을 위해서 정신을 가다듬읍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