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7일 연중26주일 (성령강림후17주일)
- 에제18:1-4,25-32, 시편25:4-10, 필립2:1-13, 마태21:28-32
한국 역사에서 이름도 유명한 장군 김유신의 독특한 일화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그는 청년기에 큰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국으로 나뉜 한 반도를 통일하겠다는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허망한 꿈이 될는지 모르겠다고, 누구보다 그의 어머니가 안타깝게 걱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천관’(天官)이라는 기생에게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들 앞에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정신 좀 차리라고 간곡하게 타일렀습니다. 효자인 김유신은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기생집을 드나들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피곤한 나머지 말 위에 탄 채 졸고 있었습니다. 그의 애마(愛馬)는 스스로 알아서 자기 주인이 잘 가던 천관의 집으로 갔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방문한 김유신을 반가이 맞이하는 기생 천관의 음성을 듣자마자, 김유신은 말에서 내려, 칼을 빼어 들고 말에게 일갈을 했습니다. “네 비록 미물(微物)일지라도 어찌 이리 주인의 맘을 모르느냐?”하면서 말의 목을 베어 버리고는, 걸어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우리 맘에 단호한 결단을 하고 싶어하는 때가 있습니다. 적어도 난 이래서는 안 된다, 이제 더 이상 나의 그릇된 습관에 내 인생이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맘을 먹고, 단호히 나 자신의 과거와 단절하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복음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일화는, 아들 형제를 둔 한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밭에 할 일이 많은 것은, 씨를 뿌리는 봄부터, 김을 매 줘야 하는 여름, 모든 수확을 거두어 들여야 하는 가을까지 어느 때건 항상 일이 많습니다. 농부로서는 사람이 있는 대로 동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손쉬운 두 아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오늘 밭에서 일을 좀 해야 하겠다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소망을 들은 두 아들의 대답이 제 각각이었습니다. 큰아들은 “예, 오늘 제가 밭에 가서 일할 수 있습니다.”라고 시원스럽게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아버지, 저는 오늘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밭일에 못 가겠어요.” 했던 겁니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로 됐다는 것입니다. 밭에서 일하겠다던 큰 아들은 나중에 자기 일을 보러 외출해 버렸고, 밭에 못나가겠다던 작은 아들은 친구들과의 약속은 나중으로 미루고, 밭으로 나가서 일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 비유로 말씀하셨는지를 나중에 본문 25절에서 설명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뉘우친다는 말은 과거에 무슨 잘못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뉘우친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뉘우치고 돌아서서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면, 비록 약간의 문제는 여전히 남을 테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25절 말미에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했는데, 우리의 잘못을 뉘우쳐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와서 하느님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으로 우리들의 보람을 삼고 살면,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뢰를 얻는 것이야말로 복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활의 모범생이 되는 것으로 믿음을 인정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나도 좋아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나도 좋아하고 살면, 나는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도의 영원한 정신적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를 잘 아십니다. 그 분이 어렸을 적에 다른 소년들처럼 평범한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그의 동네에 양고기 꼬치구이를 파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어린 간디는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꼬치구이를 사 먹을 돈이 없었습니다. 단념하지 못한 그는 어느 날 그의 아버지 침실로 몰래 들어가서 장롱을 열고 동전 몇 푼을 훔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상점으로 달려가서 꼬치구이 몇 점을 사 먹었습니다. 너무 맛이 있어서 단 번에 먹어 치웠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걸려 밤에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뜬 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통스럽게 밤을 새우기보다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정직하게 고백을 하는 편이 나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밤중에 아버지는 주무시는데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종이 조각에 몇 줄 사연을 적어서 “잘못 했으니, 부디 용서해 달라”는 결론과 함께.., 그 종이 조각을 돌돌 말아서 아버지 침실 열쇠구멍에 끼워 넣고 자기 잠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튿날 새벽이 밝았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자, 어쩐지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금방 달려드실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급히 아버지의 침실 쪽으로 갔습니다. 열쇠구멍으로 들여다 보니 아버지께서 그 종이 조각을 읽으시며 눈물을 닦으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때 그는 더 지체하지 못하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 아버지께 자기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해 주셨습니다. 후에 그는 성인이 되어 이때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그때 아버지의 얼굴은 마치 하느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뵙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만일 내가 타고 있는 배가, 그 옛날 타이타닉처럼, 진행하고 있는 전방에 빙산을 만났다고 합시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있는 힘을 다해 키를 잡아 틀어서 배의 방향을 고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급한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삶이 장차 닥칠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깨닫는 일이 성경에서는 ‘뉘우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뉘우치면 방향을 돌이켜야 합니다.
현대대수를 철학연구에 도입시킨 ‘화잇헤드’라는 분은 무신론자 버트란드 럿셀과 더불어 이 새로운 철학연구에 선구자로 이름이 난 분입니다. 화잇헤드 역시 젊은 시절에 학문연구에 심취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발길을 끊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도 역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살고 있던 도시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오던 그의 앞에 한 노파가 눈 구덩이에서 헤쳐 나오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화잇헤드는 얼른 달려가서 그 노파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 노파는 그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큰 친절을 베푸시는 것을 보니까,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신데, 어느 교회 출석하십니까?” 했습니다. 화잇헤드는 자신은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노파는 “아니, 다 늙어서 어쩌자고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단 말이요? 그러다가 나처럼 뜻밖의 사고를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나는 눈 구덩이에서 죽는 줄 알고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구먼.” 했습니다.
기독교인에게서 지극히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화잇헤드는 이때부터 깊은 사색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다분히 인식론적 개념처럼 들리는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의 추구’는 그의 관심 밖에 있었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 인간의 삶을 형성하고 있는 크고 작은 모험적인 결정들 속에 담겨 있는 판단의 순간들이 신앙을 형성하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 옛날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모세의 생애에서, 다니엘의 생애에서 보는 모험적 결단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생애에서도 이어져가는 아름다운 결단들임을 깨달았습니다. 그후 화잇헤드는 다시 그의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고, 현대기독교의 한 큰 신학적 계보를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표상은 십자가 뿐입니다. 십자가는 수고요, 고통이요, 희생입니다. 이것을 말로만 우리들의 표상이라고 하고, 실천적인 삶에 십자가다운 삶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하루 하루가 불복종의 나날로 허무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작은 아들처럼 순종의 결단으로 하루를 살게 될 때에는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 기독교 신앙의 ‘신바람’이 우리를 옛 성인들의 기쁨 속으로 인도할 것이고, 주님께서 바라보시던 영원한 광명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