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도 폐기를 당하시는 예수님

2020년 10월 4일 연중27주일 (성령강림후18주일)

  • 이사5:1-7,   시편80:14-19,   필립3:13-21, 마태21:33-43

정치체제가 사회공동체를 중시하는 정치체제든, 아니면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정치체제든지 간에, 한 사람, 한 사람 보기를 그의 용도가 어떠냐에 따라 평가한다는 점에 있어서 어느 사회든 이름만 다르지 모두 ‘못살 놈의 세상’인 점에 있어서는 다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다만 하느님 만이 인간을 그의 용도에 따라 평가하지 않으시고, 인간이라는 사실 그 하나 만으로도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로 여겨 주십니다.

실존문학가 카프카는 그의 ‘변신’이라는 작품에서, 인간의 ‘용도우선주의적’ 관점을 고발하면서, 한 가정의 비극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레고르는 한 가정의 경제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직장인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보니 자신의 몸이 이상스럽게 변해 있었습니다. 인간의 몸집 크기로 쇠똥벌레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느 날처럼 아침 출근을 서둘렀지만, 가족들이 이런 괴상망측한 몸으로 어떻게 출근을 하냐고 붙잡았습니다. 아침 식탁에 앉았어도 다른 가족들과는 다른 것이 먹고 싶었습니다. 날마다 그의 몸은 더 흉측스럽게 변해갔습니다. 처음에는 이 불쌍한 그레고르를 동정해 주던 가족들도, 인내에도 한계가 있는지, 점차로 더욱 보기 싫게 변신하고 있는 그레고르를 차라리 집에서 보지 않기를 바랐고, 아예 이 세상에서 없어져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변신한 그레고르가 죽는 것으로 이 작품은 끝납니다.

이런 극단적인 가설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말하겠지만, 실제로 사랑하던 부모일지라도 그들이 이제 늙어 아무 용도가 없어지게 되고, 심지어 각자의 삶으로 바쁜 가족들에게 귀찮은 짐으로 여겨지기 시작하면, 변신한 그레고르 못지 않게 ‘차라리 없어지면 좋을 존재’로 여김을 받는 것이 어느 특정한 집안 만의 사정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다만 이 세상의 노인들 만이 아니라, 심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 정신신경과 질환을 오래 가진 사람들, 생산력은 일체 없고 소비 만을 하는 존재로 여김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본문에 나오는 비유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라고도 말합니다. 여기 보면 포도원 주인이 있고, 주인이 자기 포도원의 소작을 맡긴 농부들이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과 소작을 맡은 농부들 사이에 아주 해괴한 일이 벌어집니다.

소작 농부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세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을 때려 죽이고, 찔러 죽이고, 돌로 쳐 죽이고 그랬습니다. 이런 농부들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비유의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 전개됩니다.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때에도 농부들은 주인의 종들을 다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인이 자기 아들을 보내면서, “내 아들이야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 했지마는, 주인의 아들을 본 농부들은 “음, 주인의 아들이 왔구나. 이 놈을 죽이면, 상속할 사람이 없을 터이니, 이젠 완전이 이 포도원은 우리 소유의 포도원이 된다”하고는 달려 들어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고 나서 농부들에게 어떻게 했겠느냐?”는 질문으로 비유의 말씀을 끝맺습니다.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는 주님의 심정에 어떤 의도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었을까요? 이것은 창조 이래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불화하게 된 내력을 분명히 묘사하시는 비유의 말씀이셨습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대신해서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려는 그릇된 인간들에 의해서, 어느 시대나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이윽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 달려고 모의를 하고 있는 사실을 고발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어처구니 없는 농부들의 횡포’가 아니라, 실제로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지금껏 당해 오고 계신 일을 폭로하신 비유였던 것입니다.

복음성경을 읽다 보면, 의아스러운 부분 한 가지가 보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의 공생애(公生涯) 삼 년을 사시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심지어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는 정말 입성 후에는 왕위에 즉위하는 예식이 거행되고, 새로운 등극하신 임금님 예수로 등장하실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며칠도 지나지 않아 결국 예수님은 신성모독을 범한 죄인으로 몰리고, 빌라도 법정에서 마치 인민재판 하듯이 다수군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떠들어 대는 아우성에 그만 로마총독 빌라도도 어쩔 수 없이, 그냥 “너희들의 요청대로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한다” 판결하고, 예수님을 죄인처럼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내어 주고 맙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루살렘 입성 때에 ‘호산나’를 불렀던 사람들이 다 어디 갔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빌라도 법정에 모였던 무리들은 대제사장이 동원한 무리들이었던 것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체포되어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비좁은 예루살렘 거리에 금방 퍼졌을 텐데, 그토록 전국에서 따라다니던 ‘예수님 팬’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주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누굽니까?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표현대로 “목자 없는 양무리”(마9:36)와도 같았고, 부평초처럼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유랑민일 수도 있습니다. 장정 만도 오 천 명이나 되던 큰 무리가 벌판에서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보리떡과 구운 생선으로 한 끼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 초라한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어도 고마워 할 수 있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빌라도 법정에 있었다면다소라도 주님의 편에서 힘을 썼을 것이라고 제가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더 이상 ‘용한 의사’로서의 용도도 사라졌고,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의식주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왕’이 되어야 한 분이라고 추대하고 싶었던 정치적 기대도 이젠 어느 사람의 마음 속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들의 삶이 예수라는 사람 때문에 구김살 만이라도 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그들의 바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시던 그 해 유월절을 계기로, 손으로 곱을 만한 수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예수님께서 용도폐기를 당하지 않은 곳(마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천 년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아시아의 한 나라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의 용도는 지금 어떻게 평가되고 있습니까?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그 어떤 제물도 있을 수가 없고, 우리 인간의 가장 요긴한 숙제는 죄의 문제인데, 결국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세상 모든 금은과 보배를 다 모아서 치러도 한 사람의 생명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공로 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는데, 그런 고귀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의 용도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냐고 제가 여러분 각자에게 지금 묻고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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