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들어가는 조건

2020년 10월 11일 연중28주일 (성령강림후19주일)

  • 이사25:1-9, 시편23, 필립4:4-13, 마태22:1-14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나?

‘천국’이라고도 하고, ‘하늘나라’라고도 부르는 별천지는 지금 이 세상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가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꽤 있는 듯합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가시기를 희망하고 계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예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사람들’로 보기보다는 ‘천국 가려는 사람들’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표를 예약이라도 해 놓은 사람들을 향해 질문하듯이 이렇게 묻습니다. “그 예약권을 좀 보여 달라”고 말이지요. 우리는 할 말이 없곤 합니다. 예약권 같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들도 뭔가 확실치 않아 보여서, 성경을 뒤적이며 천국은 어떤 곳인가를 알고자 애씁니다. 성경 어느 부분에도 천국에 관한 설명문이 가지런히 작성되어 있지를 않고, 여기 저기에 산발적으로 천국에 관한 언급이 나올 뿐입니다. 가령 복음서를 보더라도, 천국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묘사는 주로 비유의 말씀들인데, 그 대부분은 천국 갈 수 있는 사람들의 자격에 관한 말씀이 주종을 이룹니다. 그러나 천국 자체의 모습과, 규모와, 그곳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그리 자상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천국을 말하는 듯이 보이는 설명이 요한계시록 21장입니다. 그곳은 “열 두 대문이 있다”(21:21)든지, 그곳엔 “성전이 없다”(21:22) 든지, 그곳엔 “해와 달이 없다”(21:23)는 설명이 나옵니다. 북경 자금성에도 열 두 대문이 있는데, 천국은 그런 데냐는 상상을 하게 만듭니다. 물론 천국 자체가 성전일 테니까 별도의 성전이 필요 없을 것이지요. 또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이유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빛이신데 왜 다른 빛이 필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도 없다”(21:25)는 겁니다. 이 모든 설명들이 천국을 상상해 보기에는 부족한 설명들입니다.

더구나 계시록 21장이 천국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 거리가 있는데, 그것은 21장에 소개된 곳이 “새 예루살렘”(21:2)이라는 곳이라고 전제하면서, 마치 ‘새 예루살렘’이 천국인 듯도 하고, 그렇지 않은 듯도 하게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교회사에서는 이것은 천국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천국에 갈 준비를 하는 장소로 ‘새 예루살렘’을 이해해야 맞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어떤 신자가 계시록 21장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 “그곳엔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21:4)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그곳엔 다시는 ‘이사 가는 일이 없다’는 말씀이 붙었으면 훨씬 더 좋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가난한 성직자의 아내여서 결혼 이래 40년 동안에 대략 50번을 이사한 분입니다. 이사가 꽤 어려웠겠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자기가 겪은 지상에서의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으면 합니다. 식량이 부족해서 고생을 많이 하신 분들은 그곳은 먹을 것이 풍족했으면 하고 바라고, 폭력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신 분들은 그곳은 절대평화가 보장되는 곳이기를 바라고, 일찍 사랑하던 사람을 잃으신 분들은, 그곳은 그리웠던 사람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장소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천국을 지상세계의 부족은 보상하는 개념으로 바라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한 수수께끼 같은 천국 설명을 남겨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의 말씀에서, 영의 눈으로 본 것이었는지, 육신을 지닌 채로 하늘나라에 가 보았던 것인지 잘 분간을 못하겠다(고후12:3)고 하시면서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12:4) 했습니다. 그곳이 “셋째 하늘”(12:2)이라고 했는데, 위로부터 세는 층인지, 아래로부터 세는 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도합 몇 층의 하늘까지 있는 것인지 궁금증만 자아냅니다.

1948년 평양에서 살던 제가 방 벽에 붙어 있는 사진엽서에서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볼 때마다 기절해 자빠지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높은 집이 있어?”하는 것이 귀여웠던지 일곱 살 난 저를 위해서 제 키에 맞춰 부모님이 다시 낮게 붙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자주 기절하는 시늉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삼층천(三層天)을 밝힌 이유가, 대부분 단층 집에서 살기 때문이었을까요? 우리에게 더 궁금한 것은 천국의 모양이나 규모나 거기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곳에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사시던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의 세세한 설명은 해 주지 않으시고, 그곳에 갈 사람들의 자격에 관해서만 말씀을 하신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궁금해 하는 대로, 물상적으로 천국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면 천국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원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천국에 관광 가자는 취지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삭막한 기독교가 되어 있겠습니까? 또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도 그런 관광객을 주님의 집에 들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때로는 “하느님의 나라”, 때로는 “하늘 나라”, 때로는 “새 예루살렘” 등등의 용어를 사용하시면서,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관해서만 말씀하고 계십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아마도 “와서 봐라”고만 말씀하시고 싶어 하시는 듯합니다.

오늘의 복음 본문에 나오는 비유가 바로 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요건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혼인잔치를 인용해서 말씀하시는 비유입니다. 아마도 천국은 모두가 즐겁고 희희낙락하는 혼인식과 흡사한 곳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혼인식에 들어가 피로연에서 함께 잔치를 먹는 것으로 천국이 묘사되어 있는 점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과연 아무나 거기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일까요?

첫째로, 간절히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면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못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자기 일 바빠서 임금님의 혼인 잔치를 사양할 정도라면 “좋다, 관둬라.” 하신다는 겁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기본질서가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사랑, 이 두 가지인데, 자기 일이 바빠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뒷전으로 밀리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상실한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이어도 되고, 미처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어도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어느 정당 사람이든, 어느 사회단체에 소속해 있든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정의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 일을 위해 자신의 모든 일들은 뒷전으로 물릴 수 있었던 사람들을 환영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혼인잔치에 들어갔다가 쫓겨난다는 말씀으로 비유 후반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하느님 나라의 기본질서를 수긍했다 하더라도, 그의 삶이 하느님의 정의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지 않다면, “그래, 너도 그렇군, 나가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예수님의 편에 선 사람들과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가시겠다는 뜻입니다.

세례교인이든 아니든, 견진신자이든 아니든, 어느 교파에 소속해 있든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복을 입었느냐 안 입었느냐, 즉 지금 땀을 흘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지금 피를 흘리고 있는 목적이 하느님의 나라의 기본질서, 정의와 사랑의 위해 살고 있느냐 아니냐가 그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정의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기필코 쟁취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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