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
본문: 히브리서 11장 3절, 11절하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 사라는 약속해 주신 분을 진실한 분으로 믿었던 것입니다.”(공동번역)
성경은 ‘믿는다’라는 동사를 두 가지 용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많이 혼동을 줍니다. 가령 본문 3절에서 “믿음으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압니다”에서 사용된 믿음은 인식에 관련된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창조 때에 살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줄을 믿는 것은 어떤 근거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까 믿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뒤엣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 줄 알겠다고 하면 끝입니다. 하지만 11절에서 “약속해 주신 분을 진실한 분으로 믿었다”고 한 말에서 믿었던 내용은 하느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한 약속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아들 이삭을 낳았던 것이라고 사라의믿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실상 원문(11절 하)의 뜻은 “사라는 ‘약속을 하신 분’(하느님)을 신실한 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삭을 낳게 되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믿음직하다는 것입니까? 사라입니까? 아니지요. 하느님이 신실하시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사라는, 하느님의 대리인들과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던 천막 바깥에서 이 말을 엿듣다가, 달거리가 이미 끝난지 오래된 자신의 여건을 무시한 터무니 없는 약속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믿음은 사라 할머니처럼 나약하기 그지없습니다.
80년 살아 보니까, 인간(저 자신)이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인간은 믿음보다 의심이 많고, 인간은 약속을 쉽게 저버리며, 인간은 배신을 잘 하고, 인간은 신뢰해 주는 사람에게 도리어 엉뚱한 짓을 저지릅니다. 그런 인간도 가끔은 하느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있어서, 가끔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저 같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희망 속에서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인간 ‘이 아무’의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포기를 모르시는 하느님의 믿음 때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하느님의 구상은 엉성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못미더운 인간들을 데리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 보시겠다니 말이 됩니까? 하지만 기필코 하느님의 구상은 성공할 것입니다. 무슨 방법으로? ‘자비와 관용과 인내로’(롬2:4)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우리 믿지 못할 인간(저 자신)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믿어 주시는 하느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 믿음의 하느님, 하느님의 믿음으로 지금껏 목숨을 이어 옵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믿음이 우리들의 순종으로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