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국가, 그리고 정부

<Lectionary에 의한 주일설교, 2020. 10. 18>

마태22:15-22 (이사45:1-7, 시편 96:1-9, 살전 1:1-10)

오늘의 복음본문(“카이사의 것, 하느님의 것”)이 기독교 국가관의 어떤 깊은 신학적 근거를 담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죽기를 두려워하시지 않았고, 당신의 죽음은 “만민을 대속하시는 제물로 바쳐지는 죽음”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때와 장소가 “대속의 제물이 되실 것이 분명한 경우”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본문의 경우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원들이 합세해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제기한 질문 앞에 주님께서 대단히 지혜로운 대답으로 위기를 모면하신 사건이었던 것으로 이해합니다. 아직 돌아가실 때가 아니신 것입니다. 다만 이 본문을 오늘에 배정한 정과위원회의 취지로 보아, 오늘 온 세계교회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교회를 섬길 사명과, 또한 한 국가에 속한 국민으로서의 사명이 서로 충돌을 일으킬 때,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간략하게라도 설명하기 위해서 택한 것으로 봅니다.

1948년 평양의 감리교성화신학교는 북한 당국에 의해서 ‘불순분자들의 학교’라는 판정을 받고 폐교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재학생 450여명과 교수들은 이 갑작스런 폐교령 앞에 몹시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문을 닫기로 하고, 학교의 마감행사로 그 해 말에 헨델의 메시야 오라토리오 발췌곡 공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내무서’(경찰서)는 학교의 동태를 살피러 내무서원(경찰)을 보냈습니다. 연습을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서 악보를 달래서 가져간 후, 다시 와서 몇 개의 곡은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연주를 하지 말라고 한 곡들 가운데는, 오라토리오 앞부분에 나오는 바리톤 솔로로, 시편 2편을 노래하는 “어찌하여 나라들이 술렁대는가?” 곡이 들어 있었는데, 이 곡은 ‘북조선인민공화국’을 조롱하는 노래로 들릴 위험이 있는 곡이어서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19:6)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께서 다스리신다” 그 유명한 할렐루야 코러스의 가사를 ‘인민이 다스린다’로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지 않으면 이 곡은 연주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연주회 날이 되고 평양 남산재감리교회에서 있었던 메시야연주에서 학생 합창단은 원래 악보대로 “어찌하여 나라들이 술렁대는가?”를 힘차게 불렀고, 마지막 곡으로 배정했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께서 다스리신다” 가사를 있는 힘을 다해 불렀습니다. 결국 이 연주회 이후에 많은 학생들이 수배를 당해, 잡혀 간 사람은 거의 다 순교했습니다. 나중에 미국북장로교회 총회장을 지내신 고 이승만목사가 그때 이 학교 학생회장이었기 때문에 그를 수배하던 내무서원들이 학생회장을 붙잡으려고 꽤 노력했습니다마는 종내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대신 그의 가족 몇 사람을 그의 집앞에서 총살했습니다. 바리톤 솔로를 부른 학생은 내무서에서 고문을 당하던 나머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때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수가 대략 25명 가량으로 계수합니다.(성공회 고 소영필 신부는 당시 성화신학교 학생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현장의 증인입니다.)

국가 권력이 교회를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못살게 구는 나라는 나라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하려면 국민에게 최소한의 자유, 즉 언론의 자유, 그리고 양심과 신앙의 자유, 이두 가지는 보장을 해 줘야 그것을 나라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최소한의 자유이며, 다른 모든 자유는 이 두 가지 자유에서 비롯됩니다.

교회는 국가 속에서 정치 로비스트 그룹은 아닙니다. 정당처럼 정치에 교회가 개입하는 일은 교회의 덕스러운 태도가 아닙니다. 다만 정의를 가르치고, 책임사회가 되기를 권장하고, 신실한 국민을 배양하는 데에 이바지 할 수 있는 한 이바지하는 것이 국가를 위해 교회가 할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래의 사명은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본질은 하느님의 정의와 하느님의 사랑인데, 세상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 전도도 선교입니다. 교회는 이 일의 동기를,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사건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항상 예배 속에서 이 사건을 다시 해석하고 오늘의 그 의미를 재추출하곤 합니다. 이로써 신자들이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닮아가기를 힘쓰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권력이 구태여 교회와 맞설 필요가 없고, 교회가 국가 권력과 이유도 없이 긴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전체주의 독재를 추구하려는 정부가 곧잘 국민들의 공공연한 정권비판을 권력으로 내리누르려 할 때가 있는데, 이때 최후까지 입을 다물지 않는 집단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정부가 교회를 국가 권력을 가지고 박해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가 불의한 정권에 동조하고 심지어 아부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은 부패한 정권 못지 않게 목불인견인데, 한국의 근세사에서 많이 본 일입니다. 가령 일제 때, 솔선해서 ‘황국신민선서’를 예배 서두에 회중으로 하여금 선서하게 한다든지, 또는 신사참배단을 인솔하고 일본을 다녀오는 여행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회 목사가 주선한 일도 있었습니다. 또 6.25전쟁 때에 인민군이 미아리를 넘어 서울시내에 진입하던 무렵, 종로 기독교회관에 ‘인민군 만세’라고 플라카드를 써서 건 목사도 있었습니다. 한참 군사정권이 세도가 당당했던 1969년부터 독재자 박정희의 대통령 삼선을 법으로 타당화하기 위해서 삼선개헌이라는 것을 했는데, 이때 대부분의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이 “삼선까지는 허락할 수 있다”는 개헌지지성명을 도하 신문에 대문짝같이 발표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땅에 떨어틀린 일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정부와 맞서서 권력 다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마는, 동시에 교회는 정부와 규합하여 정권과 운명을 함께 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교회는 어떤 정부군 간에 정부와 팽팽한 긴장관계를 지니면서, 정부의 국가운영을 감독할 법외적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정부에 감사원이 있으므로 세세한 숫자를 감독할 책임은 교회가 지지 않지만, 큰 범위로, 나라 살림이 정의롭게 운영되고 있는지, 무책임한 일이나 불법적인 일은 없는지, 특별히 국가안보와 산업진흥에 힘쓰고 있는지,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의지 없는 자들을 잘 돌보고 있는지, 이런 일들을 교회가 감독해야 합니다.

역사에서 국가 권력과 기독교 교회가 극렬하게 대치하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대치하게 된 중요한 동기는 대부분의 경우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집권 정부가 교회를 그들에게 비협조적인 집단이라고 보는 경우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집권정부를 지지해 줘야 할 책임은 없습니다. 그러나 집권정부를 무작정 반대해야 할 일도 아닙니다.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고무하여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단체이고, 국가는 백성들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 법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일하고 있는 기구로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는, 백성들로 하여금 힘써 정의를 세우고, 서로 도우며,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공동의 목표를 이루는 일에 협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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