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묵상>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공동번역)
초등학교 하급반 학생인 자녀들에게 비싼 스마트폰을 사 주는 부모님들이 계십니다. 어린이들이 폰의 그 막대한 용량 가운데 얼마나 많은 기능을 사용하고 있는지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어떻든 값비싼 폰을 사 줄 수 있으면 사 주는 것이, 그들 자녀가 전자기기에 일찍부터 익숙해지는 방법일 테니까, 자녀들이 나중에 ‘전자만능’ 시대를 사는 데에 덕을 볼 것 아니냐는 생각에서, 좀 과하더라도 일찍 사 주는 편이 낫겠다는 것이 그들 부모의 생각인 듯합니다.
스마트폰에 비겨서 말씀을 드리자면, 성령은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스마트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 받을 수 있는 매체(?)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성령께서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시고, ‘페르소나’(인격이나 신격)를 지니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의 처지를 따라, 때로는 알아듣게 가르치시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격려도 해 주시고, 꾸짖기도 하시고, 힘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갈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스마트폰’인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구원의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도 중요한 성령의 도우심을 회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시에 혹간 병이 걸린 사람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별로 원치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에 비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과 화해하시고자 인간이 되어 오셔서 인간에게 팔을 펼치셨지만, 그들은 외면했던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그 예수님을 대신해서 지난 2천 년 동안 영으로 살아 계신 성령께서 우리 곁에 오셔서 계십니다. 그러나 역시 우리 인간들에게 외면 당하십니다.
기껏 스마트폰을 가지고 전철 안에서 무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가 보니까, 대부분 게임을 하고 있는 거에요. 물론 자기 폰을 가지고 자기가 놀고 있는데 뭘 어떠냐 하겠지요. 그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기껏 전화 송수신이나, 게임을 할 바에는 그렇게 비싼 물건을 만들 필요도 살 필요도 없었지 않습니까? 부모님 졸라서 스마트폰 샀으면 그 쏟아지는 정보가 다소라도 유용하게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옳지요.
그 고귀한 ‘나의 구원을 위한 영적 정보를 현지시각으로 전달해 주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를 거절하면서, 왜 성령님의 방계적 역할에만 관심을 두겠습니까?
<기도> 주 성령님이시여, 영의 눈이 먼 저희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