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편 8절: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셀라’는 읽어야 하나, 아니면 읽지 않아도 되나, 당황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것은 읽지 않고 그냥 눈으로만 보고, ‘셀라’가 있는 곳에서 막간여흥(interlude)의 시간을 가지면 됩니다. 유대인들의 막간여흥은 흔히 이 구절을 ‘무한반복’하면서 빙빙 돌며 춤을 추곤 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 반복하다가, 인도자가 그만 하자는 싸인을 주면 마치고 예배는 계속됩니다.
‘셀라’라는 말의 어원은 ‘살라’ 즉 ‘보충하다’, ‘증보하다’라는 말의 명령형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쳐들다’라는 히브리 말(‘살라’)에서 왔다고 합니다. ‘셀라’가 있는 곳에서 고개도 쳐들고, 악기도 쳐들고, 엉덩이도 들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이 시편에 일흔 한 번 나옵니다. 하지만 ‘셀라’라는 싸인이 없어도, 매 시편의 첫 절이나 마지막 절은 ‘셀라’가 있는 구절과 대등하게 보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들의 군무는 단순한 스텝입니다. 회중은 서로 손을 잡고 돕니다. 모든 공간을 꽉 채우고 빙빙 돕니다. 물론 그들의 시편송 멜로디는 유지한 채로, 같은 곡조, 같은 노랫말로 춤이 계속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셀라’가 붙어 있는 노랫말의 역동적인 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고백이고, 공동의 결단이고, 회중의 강렬한 염원이요, 소망이기 때문에, 한가한 문구가 아닙니다. 가령 본문처럼,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이 구절을 지금 여러분 각자가 방안에서 일어나셔서, 여러분의 간단한 춤사위로 방안을 빙빙 돌면서 약 5분 동안만 반복해 보세요: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진정 우리 마음 속에, 우리를 가두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죄의 속박, 모든 삶의 굴레들을 하나님께 맡겨 올리는 기도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왜 이것을 되살리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복음성가를 부르는 열정은 바로 이 ‘셀라’부분의 찬송을 다분히 닮았습니다. 일어서서, 반복해서, 회중이 함께, 신앙고백으로, 또는 간절한 기도로, ‘고개를 들고’ 하나님을 향해 오래 부릅니다. 어떤 분은 혼자서 춤을 추기도 합니다. 여기서 손쉽게 ‘셀라’의 춤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공부했던 신학교에는 대부분 미국 학생들이었지만, 유대인 기독교인도 와 있었고, 팔레스타인 신학생도, 아프리카 신학생들도 와 있어서, 함께 시편 133편(“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을, 우리들의 기타와, 비올라, 그리고 아코디언도 모두 쳐들고 빙빙 돌아가며 ‘무한반복’ 춤을 췄던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여러분, ‘셀라’를 살립시다.
<기도> 주님, 우리들의 찬미가 온 마음과, 입술과, 몸으로 주님께 드리는 찬송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