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누가복음 19장 41-42절: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공동번역)
‘예루살렘’, 즉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예루살렘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싸움과, 파괴와, 무더기 죽음의 길로만 내달리고 있는 모습을 영의 눈으로 내다 보시며 예수님은우셨습니다.
사람들은 평화의 길이, 기상천외의 무기를 생산한다거나, 외교적인 역량을 발휘 한다거나, 아군의 군사들의 수를 크게 확충하면 다 되는 줄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금 동서의 정치지도자들과 백성들은 평화의 길로 가지 않고, 전쟁과, 파괴와, 죽음의 길로만 내달아 왔습니다.
신구약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화해’입니다. 나라 간의 화해에 앞서서, 갑이나 을이나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룸으로써 이 세상에는 평화가 온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해외선교 활동이 평화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평화를 깨는 일이란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하고 용서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화해해야 이 세상에 평화가 온다는 사실을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전해 준단 말입니까?
무슬림들도 결국 하나님과 화해해야 평화가 오는 것이며, 힌두교도들, 티벳불교도들 모두가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평화가 오는 것이며, 공산당들도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세상에 평화가 오는 것이며, 마침내 이렇게 말하는 저와 모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과 온전한 화해를 이뤄야 세상에 참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주님께서, 그 옛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시던 그 심정과 똑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미국을 보아도, 중국을 보아도, 러시아를 보아도, 일본을 보아도, 북한을 보아도, 대한민국을 보아도, 모두가 그 옛날 거라사 지방의 돼지떼들 처럼 죽음의 길로만 내리 달리는 처참한 모습으로 보이실 것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이시여, 온 세상이 하나님께 돌아와, 이 세상에 참 평화가 오게 하소서. 머나먼 길 같아도 이것이 평화를 이룰 지름길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