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누가복음 20장 35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공동번역)
외경 토비트서에 한 토막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다가 포로로 잡혀가 니느웨에 살고 있는 토비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들 토비아가 있었는데, 장가들 나이가 되었지만 친족 집안 가운데 아내로 맞이할 사람은 먼 메대 땅에 살고 있는 라구엘의 딸 사라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이미 일곱 번 씩이나 결혼을 하려 했지만, 모두 첫 날 밤에 신랑이 급사를 하곤 해서, 아주 기구한 운명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 라파엘의 도움을 받아 토비아는 사라와 첫 날 밤을 무사히 지내게 되었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곧잘 이 전래되는 이야기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과연 부활 때에 이 기구한 여인 사라는 누가 자기 남편이겠느냐, 첫번째 결혼한 사람이냐, 마지막 결혼한 사람이 남편이냐, 아니면 결혼했던 모든 사람들 다냐, 이렇게 논쟁을 하곤 했습니다. 물론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바로 이 질문을 예수님께 물었던 것은, 그들이 부활은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부활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려고 이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선지자’로 알려진 나사렛 예수라면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까 골탕을 한 번 먹여 주겠다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으로 그들의 입을 막아 버리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나 장가 가고 시집 가는 것이지, 부활한 몸은 그런 일 없다.” 하셨습니다.
흔히 이 세상에서 사랑하던 남녀가 한평생 함께 해로하지 못하고 사별했다면, “이 세상에서 못다 이룬 사랑을 사후세상에서 나누도록 …” 뭐 이런 식의 억측을 사실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임종의 자리에서 배우자에게 “여보, 사랑해요. 저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나서 행복하게 살자” 이런 말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런 부질없는 소리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사후에 부활할 때에는 장가 들 일도 없고, 시집 갈 일도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살던 때처럼 ‘김’가 성, ‘이’가 성을 그대로 지니느냐, 장로교에서 온 사람, 감리교에서 온 사람 따로 구분해서 세우느냐, 저는 그런 거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왔냐, 미국에서 왔냐, 그런 것도 따질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성직자였던 사람 따로 특별석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늘 나라의 질서는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새로운 질서일 것이고, 새로운 생활일 것입니다. 다만 놀랍도록 사랑이 충만하며, 넉넉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 복된 하느님의 나라일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던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아내, 남편, 친구, 은사님, 그런 분들을 다시 못 만난다면, 난 그런 천국은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분들에게, “천국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복된 곳이어서, 세상 인연을 회복하려는 소망이 무시 당하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그런 소망들은 모두 희석되고 말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기도> 주님, 우리가 천국을 인간적 욕심을 가지고 상상하지 않게 해 주소서. 다만 주님 부탁하신 일에만 정진하다가, 마지막 부활 때에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되기를 빕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