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죽이는 글, 사람을 살리는 글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요한복음 8장 5-6절: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공동번역)

저는 다섯 살 나던 해에 할머니에게 한글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고는 처음 썼던 글이, 벽돌 조각으로 교회당 벽에다가 ‘에스더 누나 시집 간다’ 라고 제 옆집에 살던 동네 누나를 놀리는 낙서를 했던 글이었습니다. 그 일로 아버지에게 얼마나 꾸중을 들었는지 모릅니다.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그 낙서를 지우던 저를 위해서, 제 형이 해질 녘까지 도와 주었던 고마운 기억이 지금껏 남아 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많은 글을 썼습니다. 종이 위에다 썼고, 노트에 썼고, 신문에 썼고, 잡지에 썼고, 컴퓨터에 썼고, 스마트폰에 썼고, 지금은 아이패드에 쓰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쓰신 글은 땅에다 쓰셨던 글 밖에는 없었는데, 주님께서 쓰신 글은 사람을 살리신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쓴 수 없는 글들은 사람을 살리는 글은 없고, 쓰나마나한 글들 뿐입니다. 사람들 앞에 창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쓰신 글은 그 저녁에 이미 사람들 발자욱에 밟히워 지워졌습니다. 무슨 글을 쓰셨을까요? 본문에 그냥 글을 쓰셨다고 했지, 뭐라고 쓰셨는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잊혀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뭐라고 쓰셨을까? 성경구절? 아니면, 탈무드(옛 교훈집) 인용?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리에 떠 오른 것이 있었는데, 혹시 이런 글귀는 아니었을까: “저 여자와 간음했던 남자들의 이름을 모두 불라 해서 그들도 함께 처형하자”라고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쓰셨다면, 사람들이 손에 들었던 돌을 하나 둘 씩 모두 떨어뜨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 남자들 가운데는 혹시 자기 자신도, 자기 친구도, 자기 친족도 들어갈 수가 있지 않았겠냔 말입니다.

레위기 20장 10절에도, 신명기 22장 22절에도 여자만 죽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도 함께 처형하라 했습니다. 여자 혼자서만 간음하는 방법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제 치졸한 상상일 뿐입니다. 지혜의 왕이신 주 예수님께서 땅 위에 쓰신 글은 아마도 더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고, 으젓하고, 또한 수려한 글이었을 것입니다. 그 글은 남아 있지 않아도 그 글로 흉칙한 인간들은 맥없이 물러갔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가여운 한 생명은 건져졌습니다. 한 마디 글을 써도, 제발 저도 그런 글을 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도> 생명을 주시는 주님, 수 없이 쓰고 있는 저희들의 글이 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오늘부터 저희들의 글이, 주님처럼 사람을 살리는 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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