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우신 아기”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누가복음 2장 12절: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새번역)

어떤 아이에게는 부티가 난다고, 또는 귀티가 난다고 평가를 해 줍니다. 또 어떤 어린이들을 향해서는 “오, 장군감”, “오, 사장감” 이런 소리도 해 줍니다. 저는 그런 소리 못 듣고 자라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부티 나고 귀티 나는 아이들을 보면 좀 주눅이 들곤 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부티도 안 나고, 귀티도 안 나는 아기셨던 것 같습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분이 “오늘 다윗의 동네에 …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계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는 표징이라고 하나님의 사자가 목자들에게 말해 준 안내의 모두였습니다.

‘강보’란, 갓난아이를 싸 주는 부드러운 천을 말하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아기들이 갓 태어나면 대뜸 이런 헝겊으로 싸 안아 주는 것이니까, 강보만 보아서는, 예수님을 다른 아기들과 구별할 수가 없지마는, ‘베들레헴 한 마굿간 구유에 누이셨다’는 포인트는, 주님이심을 알아볼 확실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장성하신 후에도 이 점은 마찬가지셨습니다. 주님에 관한 이사야서(53:2)의 표현이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예언이 아마도 그대로 소년 예수, 청년 예수에게 이루어졌을 것 같습니다.

‘입에 발린 말을 할 줄 모르는’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요1:46) 고 말한 것처럼, ‘나사렛 사람 예수”는 정말 별 볼 일 없지 않았겠습니까?

로마 병정들에게 벌거벗기워 채찍으로 매를 맞고, 침 뱉음을 받던 주님의 모습은 정말 초라하기 이를 데 없이 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런 대접을 사람들에게 받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함부로 부르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퍽 많습니다. 소위 대통령 차차기를 노린다는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집권하면 “기독교를 손 좀 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때에 가서야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마땅한 영광과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일까요?

<기도> 영원토록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이 세상에 오시면서 남달리 푸대접을 받아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저희를 위하여 온갖 욕을 보신 주님, 저희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세상에서 어떤 치욕을 당해도, 주님께서 참아 내셨듯 저희도 잘 참아낼 용기를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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