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예레미야서 31장 7절: “참으로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기쁨으로 야곱에게 환호하고 세계 만민의 머리가 된 이스라엘에게 환성을 올려라. ‘주님, 주님의 백성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렇게 선포하고 찬양하여라.” (새번역)
구약성경에는 ‘남은 자’와 맺으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남은 자’ 라고 함은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말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예레미야서 본문은, 앗시리아 제국에 포로로 잡혀 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 상황에서 나온 어휘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포로로 잡혀 가 살면서 앗시리아에 동화된 사람들도 생겼고, 또 낙심하여 하나님 믿기를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또는 ‘남은 자’) 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신앙의 ‘씨알 백성’으로 후대에까지 신앙을 전해 주었던 이들입니다. 종당에 그들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고, 고향으로 귀환하는 기쁜 날도 맞이하였습니다.
이 약속은 신약시대에 와서는 ‘남은 자’라는 호칭은 쓰지 않았지마는, ‘남은 자’ 정신은 살아 있어서, ‘신실히 믿음을 지킨 사람’ 등의 표현으로 신약성경 전체에 깔려 있는 정신입니다.
오늘날도 ‘남은 자’의 정신은 우리들의 신앙전통의 기본적 요소입니다. 가령 존 스토트 같은 분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변절하기 쉬운 신앙 풍토 속에서도 과감히 ‘종교적 다원주의’, ‘물질적 풍요주의’, ‘윤리적 상대주의’ 같은 것에 저항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종교적 다원주의’란, 다른 종교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존중 받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도 존중해 줘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합리적인 말 같지만, 그 말의 내면에는 ‘전도-선교 무용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지어 ‘교회 무용론’ 으로까지 비약할 수가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주의’란, 현대사회가 앓고 있는 무한대에 가까운 소득증대를 지향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인류 역사는 이 물질주의 때문에 지금 몰락할 위기에 도달해 있는데도, 교회는 ‘풍요주의’ 사고를 두둔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윤리적 상대주의’란, ‘상황주의’라고도 하는데, 절대적 윤리기준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가령, 동성결혼은 법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성직자가 현대교회에 퍽 많은데, 그들의 변명은 “인간의 성정은 다양하며, 그 다양성은 교회가 인정해 줘야 하지 않느냐” 또는 “태생이 도저히 이성과 결혼을 못할 사람도 있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성경의 결혼의 기준을 흐려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대사회가 다양성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로 가고 있다 하더라도 교회는 그 풍조에 따라가면 안됩니다.
2021년에 우리는, ‘남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지켜 나가는 중요한 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 엄위로우신 주님, ‘남은 자’에게 내리실 영광스런 개선을 저 앞에 바라보면서, 믿음을 끝까지 신실히 지키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