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로 부르시는 기준은?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가복음 1장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개역개정)

마이클 램지 대주교는 우리나라에도 오셨던 분입니다. 그 분이 서품 예정자 피정 마지막 날 설교에서 말하기를,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지위에 오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직자는 항상 예수님께 가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1대 사도들은 예수님과 항상 동행했습니다. 말하자면, 도제처럼 예수님의 어깨너머로 보면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도제제도’는 수공업이 공업의 주류였던 시대에,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거의 일생을 스승과 함께 지내면서 기술을 전수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복음을 들었고, 또 때때로 조를 짜서 각처로 현장학습을 나갔습니다. 물론 주님께로부터 치병의 능력을 받아서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로서의 도제가 아니라, 복음전도자로서의 도제였기 때문에, 그들은 곳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복음이 승리하는 경험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첫번째 제자 네 명을 부르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를 뽑는 어떤 기준이 있었을까요? 요사이 우리들처럼 스펙을 검토했을까요?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직업 배경을 가진 이들을 뽑았기 때문입니다. 어부, 세리, 열심당원, 소시민 등 다양한 출신배경입니다.

그런데 왜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것일까요? 제자는 전적으로 스승의 정신을 따라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가룟 유다는 ‘더블 플레이’를 하던 끝에 마침내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유다의 그런 인간성을 모르고 부르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배반의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누구나 배반의 기질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그 모든 나약함과 유혹을 끝까지 이기고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을 보시고자 그를 뽑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더블 플레이’를 하는 명목상의 성직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그냥 두시는 까닭은, 유능한 주님의 종이어서라기보다는, 언젠가 신실한 주님의 종으로 일하게 될 날이 올 것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저희를 주님의 종으로 불러 주신 것은, 저희의 성품이나, 실적이나, 능력을 보고 택하신 것이 아니라, 저희를 향하신 주님의 소망 때문인 것을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의 끈질긴 소망이 성령을 통하여 우매한 저희들에게서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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