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가복음 4장 39-40절: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하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하고 호령하시자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다. 그렇게 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책망하셨다. (공동번역)
저는 남들에 비해서 겁이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바닷가에 살면서도 수영을 뒤늦게야 배웠습니다. 부산대화재 때에 대청동에 살았는데 한밤중에 창밖에 솟아 오르는 검붉은 화염을 보며 오금이 저려 냉큼 바지를 입고 집을 뛰쳐 나오지 못했습니다.
마음에 겁을 느끼는 것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입력해 주신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겁도 없이 절벽 위험한 곳에 서는 것을 즐긴다든지, 사자 앞에 자기 얼굴을 바싹 들여 민다든지 하는 일은 본능적으로 겁이 나서 하지 않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남달리 겁이 많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풍랑이 너무 세서, 타고 가던 배가 뒤집할 것 같아 겁을 내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왜들 그렇게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시면서.
그러면, 그런 상황에서도 겁을 내지 않는 것이 믿음이란 말씀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바다를 향해서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라고 해서 풍랑을 멈추지 못했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곤히 주무시던 주님을 깨워 드린 것이 잘못이었단 말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데도, 제자들이 겁내어 떨고 있었기 때문에 꾸중을 들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곤한 잠을 깨웠다고 꾸짖은 것도 아니고, 바다를 향해 “풍랑아, 멈추어라” 라고 호령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꾸짖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람이 자연의 조화있는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는 우리가 잘 압니다. 그리고 건강한 바다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끔 태풍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는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잘 압니다. 바람과 풍랑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자기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문제는 자연현상, 사회현상들에 대해서 일일이 겁을 내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우리들의 자세가 주님 보시기에 부족하게 보이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주무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습니까?” 라고 ‘저희가 운운’ 하며 부르짖지 말고, 대신에 “선생님, 죄송합니다. 너무 풍랑이 셉니다. 깨어 계신 것이 좋겠습니다.” 했다면 적어도 꾸중은 덜 듣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30대에 죽으나, 50대에 죽으나, 70대에 죽으나 간에, 영원한 나라의 백성들이 염려할 것은, 하늘나라 백성 답게 사느냐 못 사느냐에 우리들의 관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늘나라 백성 답게, 모든 일을 보시며 섭리하시는 하느님 중심적인 자세로 이 한 세상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