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시편 55편 6-7절: 나는 말하기를 “나에게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그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서 나의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으련만, 내가 멀리멀리 날아가서, 광야에서 머무를 수도 있으련만.” (새번역)
눈 덮인 첩첩산중으로 오른다. 저 멀리 산자락 아래 작은 초가집, 한 사람이 서 있다. 놀랍고 기쁘다. “아, 거기에 사람이 있었구나.” 오늘날 물질문명의 발전은 눈부시다. 그러나 인간은 더 깊은 소외를 경험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살면서 듣고 싶은 말이 있다. “아, 거기에 그리스도인이 있었구나.” (김남준목사 지음,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에서)
미국의 한 신학자가 오래 전에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이란 책임적 자아가 되는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신학의 근간인 신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말세론 다 제쳐 두고 느닷없이 ‘책임적 자아’가 뭐냐 하겠지만, 그의 주장이 마음에 드는 것은, 우리가 세상 살면서 너무도 책임지는 인간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지루하게 ‘세월호 사건’을 논하는 분들이 계셔서, 저마저 ‘세월호’를 거들기가 머뭇거려지지만,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들 모두의 무책임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다시 언급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중고 배를 사 들여올 때부터, 사 온 사람이나 감독청의 감독관들이나 모두 무책임했습니다. 그 배를 무책임한 선장에게 맡겨서 날마다 운행을 했습니다. 그날 배밑창에다가 차량 여러 대를 실을 때도, 그것이 관행이기 때문에 안전규정은 지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수학여행 간다고 마음이 들뜬 학생들과 그들을 인솔하던 교사들은 즐겁기만 했습니다. 어차피 배가 바다에 뜨면 선장과 선원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들이 위난을 당했을 때에 “별도 지시가 있지 않는 한, 선실을 떠나지 말라” 한 것이 최종적인 지시였습니다. 그리고 고스란히 그 모든 새 싹들은 수장을 당한 것입니다.
이 일을 추궁하고 또 추궁하던 끝에, 전 대통령은 구치소로 갔고, 새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진정 우리들은 소망 있는 나라, 책임을 지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염원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들의 사회가 책임 지는 사회로 가는 길일까요? 이 조난 당한 ‘큰 배’인 세상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어디서 좌초하지는 않을까요? 오, 주여!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시편 기자도 이렇게 절규합니다. 하지만 이젠 날아갈 데도 없습니다. 다만 앉은 자리에서 꼼짝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합니까?
소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우리들이 하루 하루 애쓸 것은 ‘책임적 자아’, 다시 말하면, “내가 저지른 일에 내가 책임을 지며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끝날까지 이렇게 힘쓰다 보면 살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님께서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성실’은 ‘믿음’의 실체입니다. 우리 인간이 책임질 부분인 것입니다.
무책임했던 ‘복음활동’을 바로잡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
<기도>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향해서 신뢰를 버리시지 않으시는 주 하나님, 저희가 이제 성실하게 주님의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책임성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