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기에”

시편 30편 11절 (새번역)

제 막내동생은 미국 교민 2, 3세들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치며 반생을 보냈습니다. 제 손자 하나도 춤을 잘 춥니다. 한 집안 식구인 저는 춤을 하나도 못 추는데, 막내동생과 손자는 어디서 그 재주를 타고 났는지, 정말 부럽고 또 자랑스럽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본래 춤을 좋아했던가 봅니다. 그래서 선사시대부터 유래했다는 강강수월래 군무가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고, 백제시대의 산대놀이 풍습도 호남지방 여러 곳에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의 춤의 문화를 조용히 가라앉히는 데에 기여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 보면 예배찬송도 있었지만 예배춤도 왕성했던 근거가 많은데도 말입니다. 우리들의 교회에서는 춤의 예배가 이젠 거의 사라진 듯합니다.

저는 아마 춤 재주도 못 가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려서 유치원에서 간단한 춤을 가르쳐 주어도 저는 흉내를 못냈습니다. 전혀 춤의 흥을 못 느꼈습니다. 춤 시간이 되면 마냥 몸을 비틀곤 했던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 ‘희랍인 조르바’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춤은 광기가 있어야 춘다” 또는 “인간은 아픈 과거와 결별하고 싶을 때에 춤을 춘다”고 한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시인 다윗이 지닌 ‘아픈 과거’라면, 우리는 성경에서 몇 가지를 짚어볼 수가 있습니다. 그 과거들이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에서 보는 ‘춤’(시)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불효자 압살롬의 죽음이었든지, 아니면 밧세바가 낳은 갓난아이의 죽음이었든지 간에, 아버지로서의 다윗의 뼈를 녹아내리게 만들었던 아픔을 맛 본 후, 다윗이 추는 춤이었습니다. 과거는 보내 버리고, 그 아픔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그의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적나라하게 보여 드렸던 춤이었습니다.

제 늙어가는 두 다리가 고장이 나기 전에, 객기나, 광기가 아니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제 죗된 과거와의 결별을 고하는, 춤을 추게 될 날이 있을까요? 영화 ‘희랍인 조르바’에서 명배우 안소니 퀸이 그의 혼으로 춤을 추던 그 춤사위야 흉내낼 수 없다 하더라도..

<기도> 제 몸짓의 주인 되시는 주여, 제 입술의 기도 못지않게 제 매일의 삶의 몸짓으로도 주님께서 찬양 받으시기를 빕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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