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돌보기?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태복음 25장 40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개역개정)

예수님은 아쉬울 것이 없으신 분이시지요. 그런데 뭐 우리가 돌보자구요?

몇 년 전 일입니다. 제 후배 성직자의 부인이 불우여성들을 여러 명 돌보고 있다고 해서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 분은 함께 살고 있는 여러 사람을 한 분 한 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이를 제게 소개하면서 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아이는 예수님이에요” 하는 거에요.

저는 제가 평생 섬기는 ‘내 주님 예수’의 이름을 어디다 함부로 사용하느냐 하는 생각에, 순간 혼자서 별 상상을 다 했습니다. 이 어린이의 태생이 아버지가 누군지 모호하다 해서 이 어린이를, 성령으로 잉태되었던 ‘예수님’과 혼동해서 부르는 거냐 하며, 주님을 함부로 격하시켜 말하면 안 되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충격적인 언사가, 제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저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 무엄한 표현을 그 분이 썼을까 의문을 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한 성경구절이 제 머리에 떠오르면서 문제가 풀렸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새번역) 이 말씀이었습니다.

불우여성이 수많은 남자들과 상대했을 터이니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를 것이고, 어머니도 그 아이를 두고 떠나서 그 아이는 어느 누구도 돌볼 사람이 없을 터이니,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가운데도 보잘 것 없는 아이’라는 판단이 맞았습니다. 만약 그 아이를 돌보면, ‘나를 돌본 것이다’ 고 하신대로, 예수님을 돌본 것이 되는 셈이니, 그 아이는 예수님인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하시던 일이 마태복음 24장에 소개되어 있고, 26장에는 주님께서 박해자들의 손에 붙들리고, 27장에 로마군인들에게 넘기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25장은 분명히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의 장’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 유언은 세 토막의 이야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셋째 토막의 말씀에 나오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양과 염소가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에 성경편집자가 제목을 붙이기를 ‘최후의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모두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25장에다 유언하신 말씀에 의거해서 심판을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그네, 누추한 옷을 입은 사람, 병자, 수감자를 돌본 사람은 주님을 돌본 것이라 하셨는데, 나는 얼마나 주님을 돌보며 살았나요? 지금 그 대답을 해 보라고 사순절 제5일인 오늘 교회는 우리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마치 본고사에서 시험 잘 치르라고 예비고사를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도> 수많은 ‘예수님’의 굶는 소식, ‘예수님’의 헐벗은 소식, ‘예수님’의 피난 소식, ‘예수님’의 재판의 소식을 듣습니다. 저희가 예수님을 돌보는 일에 소극적이지 않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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