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주제를 아는 사람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누가복음 18장 14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새번역)

제가 거울을 보면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그런대로 괜찮다!” 하는 생각과, “저런 못난 인간도 있나!” 하는 생각이 교차합니다.

제가 눈이 앞으로만 나 있어서, 앞만 보고 다니는 것이 참 다행입니다. 만약 뒷통수에도 눈이 달렸다면, 저의 부족한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될 겁니다.

하지만, 눈이 몇 개가 달려도 인간이 스스로를 보지 못하고 살 것이뻔합니다. 스스로 늘 미화하면서 사니까요.

다만, 하나님 만은 우리의 진면목을 아십니다. 이 사실을, 인간이 스스로 깨닫는다면, 하나님은 놀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하늘나라의 비밀 하나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사람은 이 세리였다” 고요.

세리의 눈물을 보고, 하나님은 놀라십니다. “그래, 네가 오늘 제 정신이 났는 모양이지? 그래 착하다.”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가 “저 이제 정신 차리고, 앞으로는 주님 앞에서 착하게 살겠습니다. 좀 도와 주세요.” 하면 하나님은 도우실 것 아니겠습니까?

예전에,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채금자 누구냐?”고 호령했답니다. 이것은 ‘책임자’를 그의 발음으로 말한 것이지만, 직급도 많고, 사람도 많으니까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고 급한 김에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불호령이 떨어졌을 때에는, 누군가가 떨면서 회장 앞에 나타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호칭하는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이름을 사용하던지 간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호칭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제 말이 맞다면, 하나님께서 저를 뭐라고 부르실까 생각을 해봅니다.

‘의정부 멍청이 4256번’ 이렇게 부르고 계실까요? 제 동창을 만나면 절더러 “이신부님”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구태여 그 호칭을 고쳐 주지 않습니다. 제게는 그것도 과분한데, ‘이주교’라는 감당하지 못할 엄청난 호칭으로 부르라고 고쳐 줄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랜 만에 만난 제자는 “교수님”하고 부릅니다. 저는 찔끔 놀랍니다. 제가 뭘 가르쳤다고 ‘교수님’이라고 불러 주는 사람이 아직 있는가고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가 만약 ‘의정부 축복의 통로 4256번’ 이렇게 불리운다면 이에서 더 영광이 없겠습니다. 하지만 사는 모양이 너무나 동떨어집니다.

그래서 이 아침에 제 주제를 살펴서, ‘의정부 측은이 4256번’으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기도> 자비가 극진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아직껏 생명 붙여 주시고, 오늘을 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측은이’가 주님 앞에 엎드리오니, 주님의 뜻대로 써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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