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요한복음 4장 52절: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낫게 된 때를 물어 보니 “어제 오후 한 시에, 열기가 떨어졌습니다.” 하고 종들이 대답하였다. 아이 아버지는 그 때가, 예수께서 그에게 “네 아들이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각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함께 예수를 믿었다. (새번역)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의 ‘옥중서신’에서, 왜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이 병 들었을 때나, 어떤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를 노려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왜 불행한 일이 없을 때에도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는가,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서두에 제목 달기를, ‘질병이 가족 구원의 통로로 쓰이다’ 라고 쓰고 보니까, 본회퍼의 질문이 생각나서, 직접 인용은 못되지만, 기억을 더듬어서 질문의 분위기를 전해 드립니다.
물론 평소에도 주님은 우리들의 구세주 예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더욱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때가 왜 병 들었을 때인가를 묻는다면, 결국 제 경험을 말하는 도리 밖에 없습니다.
제가 교회를 떠나서 십 년 이상을 방황하다가 교회로 돌아오게 된 이유도, 집안에 큰 사고가 나서 제 자식이 입원했을 때였고, 그후 그나마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았던 때에, 주님과 더욱 밀접한 관계로 들어가게 된 동기가, 제 건강을 잃어서 종합병원에 입원하고 한 달 여를 지낼 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를 받았고, 다시는 염려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신앙을 가지려면 병들어 봐야 된다”)은 공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로 돌이키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신이나 그의 가족 가운데 누군가를 병들게 하신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아마도 용한 의원이란 의원들은 다 찾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책이 없다고 결론이 났을 겁니다. 마지막 희망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간절히 애원하기를, “어서 속히 가버나움으로 함께 가서 제 아들을 좀 살려 주세요.” 이렇게 애걸복걸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징이나 기이한 일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그때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간에 계속 재촉하기만 합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좀 가버나움으로 내려와 주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자기 자식부터 좀 살려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염체고, 예의고 다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들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이 함께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요4:53). 예수님은 아들의 병을 치료해 준 댓가로, 그의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만족해 했을까요? 그런 게 아닐 것입니다. 이것을 ‘give and take’ 관계로 풀어서는 안 되지요.
말하자면, 아들의 질병 때문에 위대하신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올 기회가 된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나 다 뽕나무에 올라갔다고 사캐오처럼 구원 받게 되는 것은 아니지요. 기독교인을 잡아 들이러 다메섹으로 가고 있다고, 누구나 그 길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지요. 주 성령님은 인간의 모든 기회를 통해서 구원의 길로 이끄시려고 온갖 애를 쓰고 계십니다. 오, 고마우신 주님이시여!
<기도> 구원의 주님, 저희가 주님을 떠나 아무리 먼 데로 헤매고 다녀도, 찾아 오셔서 저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에게,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주님의 잃은 양들을 찾아올 열심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