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 시리즈에 이어져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요한복음 5장 24절: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새번역)

저는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나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 밖에는 교제가 없었기 때문에 세상에는 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군대에 가서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에, “야, 이것이 인간 세상의 진면목이로구나!” 하며 탄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상 쌍소리 뿐이고, 오락시간이면 음탕한 춤들, 맨 이기적이고, 거짓말 잘 하는 자만 살아 남고, 정상이 비정상이고 비정상이 정상인, 정말 점잖게는 살 수 없는 세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이 이런 총각들 가운데 하나를 만나 살아야 할 텐데, 어느 한 사람도 이 사람이라면 괜챦다는 이가 하나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괜찮은 인격분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죄성이 바깥으로 노출되었을 뿐이었고, 제 죄성은 속에 감추어졌을 뿐,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보기에도 그러하다면, 만물을 꿰뚫고 보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세계를 보시는 관점은 어떠실까요? 아찔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망할 놈들!” 이렇게 평가하실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노아 때에도 탄식하시며, 다시 시작하고 싶으셔서, 홍수 심판을 내리셨고, 소돔 고모라 때에도 탄식하시며, 다시 시작하고 싶으셔서, 불 심판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좀 다릅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 뿐이고,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란 조금도 없습니다.” (롬3:10-12, 15-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들에게 죽음의 심판으로 갚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죽을 운명을 새 생명의 운명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새 생명 시리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밤중에 주님을 찾아와 복음을 들은 니고데모, 우물가에서 구세주를 독대한 수가성 여인, 베데스다 연못 가에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된 38년 된 병자, 돌무더기 속에 죽을 뻔한 간음한 여인, 나면서부터 눈 멀었다가 눈 뜬 사람, 심지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 이것이 요한복음의 줄거리입니다.

이들이 맞이했던 ‘새 생명’을 우리들과도 나누려고 요한은 시리즈로 예수님을 만나 ‘새 생명’을 얻은 이들의 일을 기록해 주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요한이 2천 년을 살았더라면, 우리 각자들의 ‘새 생명’의 내력도 기록해 주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죽음이냐, 생명이냐, 둘 중의 하나이지, 그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확실한 생명의 세계에 속하여 ‘새 생명’의 주인공으로 우리 각자의 생애가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구원의 하나님, 영원한 멸망의 운명을 벗어나, 새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새 생명 속에 눈을 뜬 우리가 이 광명한 주님의 영광을 항상 바라보며 성령 안에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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