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 생활? 개인 생활? 그럼 무슨 생활?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사도행전 4장 32-37절 :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에게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 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새번역)

초대교회의 역사 기록은 사도행전 2장에서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고, 천지개벽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생활공동체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4장 말미에 이르러, 초대교회의 초기 전통으로 생활공동체가 탄생했다는 것이 지금도 우리들을 감격하게 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성전이 있어서, 늘 각 나라, 각 지방으로부터 제사나 성지순례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 드는 곳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시작되고부터 새로운 예수신앙공동체는 모이면 흩어질 줄 모르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자연히 생활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통은 예루살렘에서 그리 오래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핍박 때문에 다메섹과 안티옥으로, 그리고 산지사방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피난을 떠나면서 예루살렘교회는 표면적으로 해산된 상태로 변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초대교회의 공동체성은 다시 로마로 가서 꽃을 피우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카타콤’ 교회였습니다. 심지어 카타콤에서 태어나 카타콤에서 죽어간 이들도 있었다고 하니까, 얼마나 그들의 공동체성이 독특한 것이었고, 그들이 당하던 박해가 극심한 것이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짧은 생애에 몇 개의 공동체를 관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역시 생활공동체에서 사는 분들은 진지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어떤 신분을 가졌건, 부자나 가난한 이나, 유무식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먹고, 한결같은 조건 속에서, 모든 필요한 작업들을 분담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고, 다툼도 겪으면서, 서로의 아쉬움과 어려움을 나누며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닌 것을 절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을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동안에, 삶에서 입증되는 신앙을 함께 연마하고 함께 경험하는 것에서 공동체 생활에 들어간 보람을 깨닫게 됩니다.

생활공동체를 오래 유지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모였다지만, 결국 드러나게 되는 인간의 이기심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차 은연 중에 공동체 생활에 회의를 품게 되고 어느 기회에 결국 공동체를 떠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초대교회가 본 보인 생활공동체의 이상은 영원한 교회의 이상(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수도단체들은 초대교회의 꿈을 실현하고, 다양한 유형으로 발전시켜서 혹은 선교를 위하여, 혹은 사회복지를 위하여, 혹은 기도생활을 위하여, 혹은 신앙수련을 위하여 각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수도자가 되지 않으면 기독교 생활공동체가 주는 유익을 맛볼 기회는 얻을 수 없을까요? 이것이 오늘의 제 말씀묵상의 초점입니다. 사실 신자들의 가정이 기독교 생활공동체의 훈련장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가정 속에서 연마된 신앙의 실제는 사회 속에서 그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독교 집안들이 그 역할을 해 왔습니다.

또 24시간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부분적인 공동체로서의 작업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현대교회의 여러 유형의 대안교회들이 그 모범적인 사례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 ‘미니멀리즘’이 크게 유행하고 있는데, 이것을 현대교회의 선교공동체를 개발하는 일과 접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든 소비가 미덕인 시대는 인류의 일시적인 경험으로 지나갔고, 이제는 인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원의 소비를 극소화하는 일이 대단히 요긴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때에, 교회가 앞장서서 인류를 한 큰 운명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기도> 주님, 우리 인류들의 탐욕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복되고 아름다운 지구를 소망 없는 곳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 때에 주님의 교회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큰 공동체를 이루어, 이 지구를 주님의 아름다운 동산으로 보전하면서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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