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요한복음 6장 24-29절 : 무리는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없는 것을 알고서, 배를 나누어 타고,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를 만나서 말하였다.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버지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새번역)

인간이 먹는 양식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십니다. 물론 농부들과 어부들, 그리고 가축들을 돌보는 분들에 의해서 우리들이 먹는 음식이 마련되지만, 그 모든 생명들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현대 이스라엘이 재건되던 당시에 유대인들이 그들의 산업구조를 새로 편성하면서 ‘기브츠 운동’을 도입했는데, 그들의 셈본으로는 총인구 가운데 백분지 1의 인구만으로도 나머지 99와 함께 충분히 먹고 살 음식을 생산할 수 있다는 그들의 가설을 입증했습니다. 나머지 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남는 노동력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 대답이 오늘의 본문 말미에 나오는 말씀,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 이 인간이 해야 할 일입니다. ‘믿는 것’도 일이냐 하겠지만,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이것을 위해서 우리 인간을 그 속에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1950년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갈’이라는 단어를 ‘거짓말’이라는 단어 대신에 사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국어학자들에게 물어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 하여간 누가 무슨 놀라운 이야기를 하면, “아쭈, 공갈” 이런 표현을 썼던 겁니다. 너무나 당시 사회상황이 어지럽고, 못 믿을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던 데에서 이런 언어습관이 유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닐곱 살 난 자식이 돌담에 올라가 있을 때, 그 아이 아버지가 담 밑에서 자기 자식에게 두 팔을 벌리면서, 그곳에서 내려 뛰면, 아버지가 받아 주겠다고 해도, 자식은 담 위에서 뛰지를 않고, “아쭈, 공갈” 이랬답니다. 안 믿었던 거에요. 참으로 슬프지 않습니까?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류들에게 당해 오시는 불신은, “아쭈, 공갈” 하던 한국인들의 불신, 그 이상의 것이었고, 지속기간도 너무 너무 오랩니다. 이제껏 그 불신은 줄어들기는 커녕, 더 팽창하고 더 악화되어, 도저히 대책이 없는 상태여서, 주님께서 이런 안타까운 호소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라고.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일을 해 옵니다. 믿음의 사람 마리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상에 오셨고, 믿음의 사람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의 초석을 놓으셨고, 믿음의 사람 바울을 통해서 복음의 빛을 천하 사방에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놀랍고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눈빛은 인간세계 속을 헤집으시며,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기도> 주 하나님, 저희들의 생애의 나날들이 모두 ‘믿음의 아멘’으로 이어져 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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