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누가복음 6:39-45 :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자기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친구야,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어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리해야 그 때에 네가 똑똑히 보게 되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또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선 더미에서 선한 것을 내고,악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악 더미에서 악한 것을 낸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새번역)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려는 우스꽝스러운 일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제 경우는 ‘눈먼 사람이 눈뜨신 분들을 인도하려고 하는’ 경우가 될까봐서 걱정입니다. 부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저 자신을 생각합니다. 저도 운전대만 잡으면, 평소에 하지 않던 거친 말이 나옵니다.
늘 조심해야겠다 생각하다가도,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갑자기 남을 저주하게 되곤 합니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지금까지, 마치 정치인은 제게 욕을 먹으려고 정치인이 된 것 마냥, 아주 쉽게 정치인을 헐뜯는 말이 제 입에서 ‘스프링처럼’ 튀어 나옵니다.
‘예전적’ 교회들은, 설교자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회중과 함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라고 선언을 하면, 회중은 모두 자기 이마와, 입술과, 가슴에 성호를 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머리 속도, 내 입술도, 내 마음도 지배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 머리에도 못 들어오고, 내 입술에는 담길까 말까 하다가 그냥 스쳐가고 말고, 내 마음에는 얼씬도 못한 채로 배척을 받습니다. 어떻게 제 마음 속에 갈무리되어 ‘선 더미’로 쌓이기나 하겠습니까?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7:24) 저절로 이 탄식이 나옵니다. 과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는 제게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새번역성경이 오늘 본문에서 ‘선 더미’와 ‘악 더미’ 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재미있는 번역입니다.
제 서툰 번역으로 이 대목을 다시 정리해서, “선한 사람은 그 선한 창고에서 선한 것을 생산하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생산한다” 로 직역할 수 있을까요?
하여튼 제 안에 ‘악한 창고’를 둔 것이 잘못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악한 창고를 부숴뜨려야 하는데, 오히려 그 악한 창고는 커져가기만 합니다.
오늘 당장, 주님의 성령께서, 제 마음 속에 지어진 사탄의 ‘악한 창고’를 철거해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그 악한 창고의 기초까지 산산히 철거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제 안의 ‘악한 창고’를 오늘 완전히 철거해 주시옵소서. ‘선한 창고’ 만 남겨 두셔서, 제 마음에서 선한 의지의 생각이 늘 제 입술로 나오게 성령님께서 주장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