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요한복음 15장 26절 – 16장 3절 :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므로, 그런 일들을 할 것이다.” (새번역)

제가 목사 아들이라고 해도, 나면서부터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학부 신학과에 들어가기는 했어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까, 제가 과연 기독교인이 맞나, 하는 신앙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적으로 도리어 힘든 기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사셨던 인물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적이 네 개의 복음서로 전해지고 있어서, 그 분이 어떤 분이었는지는 복음서를 읽어서 알 수가 있었습니다. 초인적인 능력을 나타내신 일들에 대해서는 뭔가 의문스러운 점이 많이 있었지만, 인간으로의 예수님은 상당히 매력이 있는 분으로 인식됐습니다.

그러나 ‘성령’이라는 말은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려 봐도, 성령이라는 존재는 무슨 공상 속의 개념으로 보이지, 실재하는 인격체가 아니었습니다.

상당한 기간이 흘렀습니다. 말하자면, 저도 신앙적으로 방황할대로 방황을 하고 나서, 다시 성경을 들어 읽기 시작해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오랫 동안 외면했던 성경을 새로운 눈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진작 성경을 외면하지 말았어야 했다면서, 그 오랜 일탈의 세월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후회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이 새로운 깨달음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생각해 보니, 이것은 제가 남달리 현명해서 그랬던 것은 절대 아니었고, 제 양심이 저를 일깨웠다고 할 수도 없고, 다만 어떤 분의 자상한 돌보심이 저를 이런 깨달음으로 이끌었다는 말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것을 ‘진리의 성령’ 또는 ‘생명 주시는 성령’ 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라는 관용적 표현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오랜 숙제가 풀린 것입니다.

마이클 하퍼라는 성공회 사제가 쓴 ‘Let My People Grow’(내 백성을 자라게 하라)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론과 성령론을 대비해서 자상하게 설명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똑같은 일을 하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구세주의 사역을 하셨고, 성령님께서는 영으로 세상에서 구세주의 사역을 하고 계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로 만민을 대속하셨으므로,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십자가에 오르실 필요가 없는 것이 두 분 사이의 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성령에 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성령님에 관한 언급들을 추스려 하나의 성령론으로 연구하는 일은 진정 학문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체험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오히려 간단한 일입니다. 바나나 맛을, 아무리 말로 설명을 해도 그 맛을 알 수 없어도, 일단 먹어서 맛을 보게 되면 바나나 맛을 대뜸 아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처럼 성경의 말씀을 깨닫게 도와 주시는 분이시고,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우리 마음을 일깨워 회개시키시는 분이시고, 기쁜 마음으로 사랑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며, 우리를 격려하시고, 치유하시고, 위로하시고, 소명을 따라 살게 하십니다. 다만 영으로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기도> 진리의 성령이시여, 저희 마음에 오셔서 떠나지 마시고, 늘 함께 계시며, 저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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