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았을 때 미리 하는 장례식은 어떻습니까?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사도행전 20장 17-19, 22-24, 36-38절 :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서, 교회 장로들을 불렀다. 장로들이 오니,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잘 아십니다. 나는 겸손과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 주시는 것 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 바울은 말을 마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모두 실컷 울고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들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한 것은, 다시는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울의 말이었다. (새번역)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터키)와 발칸반도(마케도니아와 그리스)로 제1-3차 선교여행을 거치고 나서, 사도행전 20장에 이르러, 주님처럼 복음으로, 적대세력이 진을 치고 있는 예루살렘에 가서 맞대결하기로 작정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다른 곳을 예비하셨을지 알지 못한 채, 가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의 생애의 가장 중대한 결심을 하고 나서, 그는 정든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과 작별을 고하기 위해 그들을 자기가 있는 밀레도까지 좀 오라고 초대했습니다. 그들과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송별예배’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살아서는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실상 바울의 장례식을 미리 행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최근에 읽은 어떤 문서 자료에 의하면, 누군가가 깊은 병으로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음을 알고, 죽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이 죽은 시체를 친지들이 보라고 장례식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살아 있을 때 작별인사를 할 수 있는, ‘미리 하는 장례식’의 방식으로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미리 하는 장례식’도 코로나 상황에서 한 번 생각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게 하기 위함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마음을 바꾸게 하기 위함일까요? 하나님의 격노하신 마음을 누그러뜨린다거나, 하나님의 ‘동으로 향하신’ 계획을 ‘서쪽으로 향하게’ 고쳐 드리는 일을 위해서 예배가 있는 것일까요?

예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고치고 변화하는 데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인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지도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예배 설교에서 장차 예루살렘에 가서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려 한다는 자신의 계획을 선포합니다. 그리고나서, 에베소 지도자들에게 맡은 양무리를 잘 돌보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특별히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일은 생기지 않기를 당부합니다.

이렇게 사명지로 각자 떠나는 일이 우리들의 예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떠나기 전에 함께 사명을 공유할 사람들과 기도하는 모임이, 서로가 마지막 당부를 나누는 모임이, 서로의 결단을 축복하는 모임이 예배여야 하겠지요.

<기도> 주 하나님시여, 저희의 예배를 온전케 해 주시옵소서. 저희가 사명자로서 주도권을 주님께 맡겨 올리는 예배, 저희 양무리를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겨 올리는 예배, 하나님 만이 높임을 받도록 기원하는 저희의 예배가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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