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누가복음 9장 46-48절 : 제자들 사이에서는, 자기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그들 마음 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새번역)
군대에는 나라가 준 계급장이 있어서, 서열이 분명합니다. 같은 계급이라도 입대한 순서나 진급한 순서에 따라서 서열이 생기기 때문에 철저히 계급을 따질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으로 식사 때에 좌석 매기는 방법이 사회 서열에 따라 순서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서열을 예수님께서 정해 주시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스스로 서열을 정해서 앉았던 모양인데, 가끔은 서열 다툼으로 문제가 생겼습니다.
까짓것 어디 앉으면 어떠냐, 하고 생각할 수 있어도, 뭔가 습관적으로 스승 예수님의 옆자리에 항상 앉는다면, 나중에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때에 그를 먼저 등용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던지 심각하게 자리다툼이 일곤 했던 것입니다.
저는 한때 발달장애아들을 위한 성베드로학교 뜰에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학교가 학부모들을 모신 자리에서 운동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달리기 경기는 운동회의 주종목이었습니다. 제 눈에 익은 학생도 뛰었습니다. 그는 아주 잘 뛰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남보다 앞서 한참 잘 달리더니, 골인 지점을 앞두고 갑자기 뜀박질을 멈추고 섰습니다. 그러더니 뒤따라 오는 학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탠드에 앉은 학부모들은 ‘어서 뛰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은 뛰지 않고 그의 친구를 기다리더니, 옆에까지 따라왔을 때에 그의 손을 붙잡고 함께 골인지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스탠드에 앉은 사람들은 아쉬운 나머지 “에이구..” 탄식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1등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기다렸다가 2등으로 들어오는 친구와 손목을 잡고 들어가면 무슨 큰 일이 일어나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내 제 머리에는 “어느 쪽이 똑똑한 것인가? 빨리 뛰어서 1등을 하는 것이 똑똑한 것인가, 아니면 기다렸다가 친구와 함께 들어가는 것이 똑똑한 것인가?” 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수결에 의해서 국회의원도 뽑고, 대통령도 뽑습니다. 그리고 뽑힌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나라가 운영됩니다. 그러면 국민이 그들을 선출하는 기준은 무엇인가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 후보들 가운데서 국민이 투표로 선택하는 기준은 “어떤 사람이 나의 이익을 대변해 줄 것인가?”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수 국민의 이익을 대변해 줄 사람이 뽑히게 될 것이지요.
다수 국민의 이익은 뭘까요? 다수 국민이 생각하는 가치관이 뭐냐에 따라서 다수 국민의 이익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수결에 의해서 국론이 결정되기를 바라는 것은 정작 사회정의나, 평화나, 번영을 꼭 이루는 방향이 될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론적으로는, 다수결에 의해서 교회가 무신론을 채택할 수도 있고, 십자가가 없는 신앙을 채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모순입니까?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실상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어린이 하나를 세우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고. 깊은 진리가 담긴 말씀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의 질서는 경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 아니고, 남을 앞세움으로 이루어짐을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예수님의 방식, 곧 십자가를 지는 정신으로 살아서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