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왕의 사제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5, 9절 묵상>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 …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공동번역)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여러분’ 이라고 말한 사람들은, 벧전1:1에 기록한 대로 “본도와 갈라디아와 가빠도기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여러분” 즉, 오늘날 터키의 이곳 저곳에서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 모두를 말합니다.

그렇게 흩어져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왕의 사제’라 했습니다. 여기서 ‘왕의’라는 말은 ‘왕실에 속한’ 또는 ‘왕궁에서 일하는’ 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최고의 통치자’이신 하느님의 집에서 사제의 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사제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사제는 ‘칼잡이’입니다. 사제 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칼로 제물의 멱을 따서 죽여, 그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고, 제물은 제단에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사제들이 전문적으로 이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제사 전통은 더 이상 종래의 ‘사제’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산제물’의 제사, 곧 삶을 하느님께 드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헌신하고자 하는 이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물의 멱을 따는 칼 대신에, 영적인 칼을 썼습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의 칼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엡6:17)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히4:12)

예언적 교회들은 설교권과 성사집행권을 아무나 행사할 수 없도록 교회 안에 질서를 세우기 위해 주교에게만 사제 임명권을 부여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가 사제의 역할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로 확장한 뜻은, 하느님을 떠난 사람들을 이끌어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고, 하느님 나라의 일꾼으로 자신을 봉헌하게 만드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담당해야 할 일이라는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사제라 했던 것입니다.

이 정신을 이어받아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만인사제직론’을 제창했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을 이끌어 ‘산제물’로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일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담당해야 할 사명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Covid-19는 교회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모여 있을 때만 교회가 아니고, 흩어져서 행하던 기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껏 교회가 쇠약해지지 않고 건재하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주재하지 않으면, 예배가 이루어질 수 없고, 성직자가 아니면 예배에서 말씀을 전할 사람이 없다는 고정관념은 깨지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우리는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성직자가 없이, 제도적 교회가 없이 어떻게 예배가 가능하냐고 낙심한다면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모든 신자는 예배의 주체이고, 예배를 주관할 자격자들입니다. 말씀을 전할 수 있고, 심지어 급한 경우에는 세례를 베풀 수도 있습니다(적어도, 성공회의 경우). 전투시에는 소대장이 전사하거나 심한 부상을 당하면, 선임하사나 향도, 또는 선임분대장이 소대장을 대리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기능도 제1세기의 교회들 처럼 업그레이드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 모든 양무리의 목자장 되시는 하느님, 온 교회를 돌아보사, 우왕좌왕 헤매지 말게 하시며, 믿음에 굳게 서서, 모든 성도들이 사제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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