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누가복음 10장 29-37절 :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새번역)

소설을 하나 써 보겠습니다.

일제 때, 한 일본 금광개발업자가 수안보에서 새재를 넘어 점촌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새재를 넘어 한참 숲길로 내려가던 중에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습니다.

마침 일본 척식회사 직원 한 사람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조금 후에 한 일본 순사가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한국인 장삿군이 나귀를 몰고 지나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를 헝겊으로 싸매어 주고, 자기 나귀에 태워 점촌까지 가서, 한 한국인의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이 사람이 자기 행낭을 풀어, 돈을 꺼내서 여관 주인에게 내밀면서 말하기를, “나는 안동 장에 가는 길입니다. 이 일본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이 그에게 낮은 소리로 꿍얼거리며 말했습니다. “일본 놈을 왜 죽게 내버려 두지 않고, 이렇게 상감 모시듯 살뜰하게 돌보아 주십니까, 원수 같은 놈을?” 이 말을 들은 척 만 척, 그 사람은 여관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고는, 안동을 향해 나귀를 몰았습니다.

* * * * * *

저의 번안소설이 별로 재미는 없지만,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람과 사마리아인의 관계와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수가 사경을 헤맬 때에, 그를 도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저는 한때 일본에 가서 6개월을 지내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일본으로 떠나면서 ‘한국사’ 한 권과 ‘일본사’ 한 권을 사 가지고 갔습니다. 한일 관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엮이어 왔는가를 역사 책에서 좀 상세히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정말, 역사책에 기록된 내용 만으로도, 한국 사람이 일본사람을 고운 눈으로 본다면 그건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일본의 동경, 구석 구석마다 가지런히 정리된 사회간접자본들은 전부 우리 선조들에게서 빼앗아 간 착취의 결과물로 보였고, 수많은 한국인들의 생명으로 값을 치르고 쌓은 적산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한 마디로 ‘원수들이 사경에 있을 때에 건져 주어라’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 주시고 싶으셨던 말씀이었습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을 등진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원수 된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셨나이다. 주여, 우리도 주님의 본을 받아 일본사람들을 사랑하고, 모든 우리의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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