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간절함과 하나님의 간절함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가복음 10장 46-52절 : 그들은 여리고에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새번역)

facebook 으로 제 글을 종종 읽고 계신 분들 가운데는, 제가 아는 한 분을 제외하고는, 시력장애를 가지신 분이 없을 줄 압니다. 본문을 보면, 거지 바디매오가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한때 그는 건강한 시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앞을 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시력을 잃은 사람의 안타까움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요? 저는 상상도 하지 못할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통한의 사람 바디매오가 예수님께서 그가 사는 여리고에 들리셨다가 이제 막 여리고를 떠나 어디론가 가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자기를 좀 도와 주고 가시라고 절규를 합니다.

얼마나 그의 외침소리가 애처로웠던지, 예수님을 에워싸고 가던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귀청 터지겠다’고, ‘좀 조용히 하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안타까운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입원환자로 어느 병원에 있을 때에 한참 치료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예배에 나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빌고 싶었습니다. 마침 주일이어서 시간대가 맞는 예배에 휠체어를 타고 예배에 갔지만, 예배실이 계단식 강당이어서 앞자리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감사성찬례를 집전하던 신부님이, 뒷자리에서 휠체어에 앉아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환자인 제가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저를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배찬을 하러 뒷자리까지 올라올 수가 없었는지, 결국 저는 영성체를 못했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제가 감사성찬례를 집전할 때에는 반드시 회중을 둘러보고 나서, 몸이 불편해서 배찬을 못 받은 사람이 계시지는 않은가를 확인한 뒤에 마감을 하도록 해야겠다고.

어떻든 제가 바디매오처럼 왜 큰 소리를 질러 외치지 못했느냐 하는 후회도 남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크나큰, 안타까움에 멍든 가슴이, 우리 앞에 계신 것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창세 이래 처음으로 육신을 입고 인류를 찾아 오신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을 좀 헤아려 주려무나” 하시며, 온 세상을 휘젓고 다니시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셨습니다.

때로는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비유’로, 때로는 ‘천국잔치의 비유’로, 때로는 ‘포도원의 비유’로, 온갖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될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알려 주시려고 애쓰시던 그 간절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안타까우심은 바디매오의 안타까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우리들이 믿는 기독교는 우리 각자의 하나님을 향한 안타까움의 내용과 하나님의 안타까움의 내용을 일치시켜 보려고 애쓰는 일이 아닐까요? 이것이 믿음이 아닐까요?

<기도> 주님의 간절하신 마음이 저희 심정이 되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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