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지 않으면 가짜 목사?…!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태복음 8장 19-22절 : 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 (새번역)

목사인 제 아버지는 책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평양에서 신학교교수 생활을 할 때에 집은 없어도 책은 많아서, 저희 집을 남들이 ‘책부자’라고 했습니다. 또 집도 없는데 다섯 아들을 두셔서 ‘아들부자’라고도 했습니다. 저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돈이 없을까” 이것은 어릴 적부터 저의 의문이었습니다.

제 큰아버지는 공부도 안 하신 분이 두부공장을 해서 돈을 좀 버시는데, 또 작은아버지는 공부도 안 하셨는데, 밀가루공장을 하시면서 돈을 많이 버시는데, 왜 공부를 하신 아버지는 이렇게 사이다병 마개를 찍어서 근근히 살아가시는 것일까, 이것이 제 아홉 살 시절의 의문이었습니다.

목사가 되면 가난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가난을 즐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이 칠칠치 못해서 가난했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아들은 제가 권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목사가 되었습니다. 어제로 목사 안수 17 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지금껏 가난과 씨름하면서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 일본인 교회 목회를 하는데 일본 정부가 영세민 명단에 넣은 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손자가 지금 일본서 고3을 다니고 있는데, 진로상담을 하면서, 신학교 가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정말 사랑하는 손자가 신학교를 가겠다고 하니까, 이론적으로는 목사인 할아버지가 기쁘다고 말해야 하는데, 정직하게 말하면, 가슴이 미어져오는 겁니다. “어쩌자고?”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성직후보자를 기 죽이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제 손주가 신학교 가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제 마음 속에 하는 생각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기쁜 마음이기는 하나, 이 힘든 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느냐,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저는 교회 일하면서 월 사례비를 1975년에 1만 7천 원, 1978년에 25만 원, 1982년에 100만원, 1989년에 도봉교회에서 얼마를 받았는지 기억 안 나고, 1994년에 강화 온수리교회에서도 기억 안 나고, 1996년에 300만원, 1999년에 180만원을 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넉넉했고, 어떤 때는 가난했지만, 주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굶기시지 않는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것을 잘 감당한 가족들이 이 일의 증인들입니다.

저는 중국에 다니면서 제 목사 생활을 회개했습니다. 중국 삼자교회 목사님들의 월급은 정부가 지불합니다. 헌금은 국가가 관리하고, 목사는 정부가 요구하는 방침대로 목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월급 수준이 상, 중, 하, 하급 식당의 홀 서비스를 하는 왕초보 아가씨가 받는 봉급수준과 같았습니다.

도저히 세 가족이 살아갈 수가 없는 박봉이어서 배우자가 어딘가 나가서 막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대책이 서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은 당국의 ‘기독교 고사 작전’ 이라고 말하지마는, 교회와 함께 목사님들이 아사 당할 위기에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가정교회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당국은 가정교회를 인정하지 않지만, 가정교회가 커지는 것을 제지하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에 25명 이상 모이는 것을 금지합니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모일 수도 없으니, 극악한 상황일 것입니다.

지금껏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아 살아 온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이제 코로나 상황을 맞아 1년 반이 흘렀습니다. 장차 교회가 어떤 운명이 될런지 우리는 그 방향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들의 살림은 교회가 보장할 수 없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제 신학교는 직업종교인을 훈련하기 보다,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요? ‘더블 메이져’를 할 사람을 말입니다.

제가 다닌 학교에 복음교회 교단의 고 지동식 목사님이 교수로 계셨습니다. 그 분이 저기 오시면, 학교 직원들이 “진짜 목사님 오신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건 그가 늘 겸손하셨기 때문이었고, 가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도> 가난하셨던 예수님, 저희도 주님의 가난함을 닮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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