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요한복음 3장 26-30절 :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보십시오. 요단 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곧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그분이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에게로 모여듭니다.”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너희야말로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한 말을 증언할 사람들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새번역)
오늘은 교회력으로 세례 요한의 생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일을 12월 25일로 정하면서, 자동적으로 ‘6개월을 앞선’(눅1:26) 세례 요한의 생일을 오늘로 정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스스로 작아지려고 작정하고 애쓴 분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 만의 사명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은 그리스도 예수가 세상에서 크신 분으로 영접되기 위해서 스스로 작아져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누구나 높아지고 싶어하며, 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 존경받고 싶어하고, 귀하게 여겨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자기 생전에 자기 동상을 만들어 세우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영원히 기념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 세례 요한처럼 애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 역사에 이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마치 승리한 전쟁에서 가장 혁혁한 공훈을 남긴 군인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죽어 있는 전사자들인 것과 같습니다.
비록 세례 요한도 아니고, 또는 성직자의 반열에 들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세상에서 드높일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라고, ‘세례 요한의 생일’을 교회가 기념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우리들에게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극작가가 무대 위로 걸어나오면 연극은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세상을 침공하실 것입니다. 자연계 전체가 하룻밤 꿈처럼 사라지고, 무언가 다른 것 – 그 전까지 한번도 생각지 못했던 것 – 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될 그 날,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아름답게, 또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무섭게 다가와 더 이상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을 그날에 가서야, ‘그의 편’이라고 나서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장경철, 이종태 옮김, 114쪽)
우리들은 비록 작아지고, 가난해지고, 낮아지고, 보잘것없게 되고, 쇠약해져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왕성해진다면, 우리들의 생애를 다 바쳐, 우리들의 건강, 우리들의 기회, 우리들의 재물을 다 바쳐 기여할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 우리들의 기쁨은 극에 달할 것입니다.
<기도> 주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는 커져야 하고, 왕성해져야 하고, 날로 더욱 영광스러워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저희는 작아지고, 쇠약해지고, 소멸되어도, 저희에게는 한없는 영광일 뿐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오늘도 저희가 살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