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깊은 곳에서”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시편 130편 1-8절 :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개역개정판)

‘깊은 곳’ 이라면, 족장 요셉의 경우는 보디발의 집에서 강간 혐의로 무고를 당해 감옥살이를 하던 일이 생각나며,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많이 맞고, 차꼬에 채워 빌립보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때가 생각납니다. 정말 ‘깊은 곳’입니다.

오늘날은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강제노동감옥에서 짐승 같은 처우를 당하며,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생각나며, 무슬림 강경분자들에게 체포되어 그들의 칼날에 온 가족이 살육을 당할 날을 앞두고 있는 선교사님의 가족들이 생각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편이 되고자, 세상에서는 깊은 곳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곳이 감옥이 될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모양으로 힘든 세월을 보내기도 합니다. 비록 자기 집에 있더라도 온갖 누명과, 오해와, 고독과, 악성 루머와, 배반의 쓴 맛을 보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깊은 곳에서 안타까운 절규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라는 애원은,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도 않고,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필귀정’ 이라는 말은 그저 격려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인가요? 세상 역사의 진실은 규명되지 못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애가 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욱 안타깝습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시인은 독백합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저도 현역 군인으로 있을 때에 전방부대에서 밤 보초를 서 보았습니다. 전방부대는 밤에 근무자 교대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저녁에 초소에 배치되면 그곳에서 밤을 새워야 합니다. 추운 겨울 밤에 별이 쏟아지는 하늘만이 위로가 됩니다. 밤새 생각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동이 틀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북한 땅에서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지금도 정권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날만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슬림권에서, 힌두권에서, 공산주의권에서, 불교권에서, 정권의 핍박과, 민간인들의 박해를 견뎌내며, 한 시간, 한 시간을 인내하고 있는 믿음의 동지들을 위해 날마다 중보의 기도를 잊지 마십시다.

<기도>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애타게 해방의 날을 기다리는, 곳곳에 흩어져 사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어서 속히 하나님의 날, 광명한 날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주님만 의지합니다. 인자하신 주님께만, 속량하시는 주님께만 매어달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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