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일수록 안 믿는가요?

<교회력에 따는 말씀 묵상>

마가복음 6장 1-6절 :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서 고향에 가시니, 제자들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어서,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예수께서는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신 것 밖에는, 거기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새번역)

저는 오래 전에 대선 후보에 나섰던 ‘ㅅ’ 씨의 얼굴이 신문에 크게 실리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런 자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가” 하면서 비웃은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사무실이 그와 같은 빌딩에 있었기 때문에, 오며 가며 인사하던 사이라고 그를 비웃었던 것입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ㅇ’ 씨는 한때 총리 물망에 올라서, 그때도 비웃었고, 같은 교회에 다니던 ‘ㅎ’ 씨는 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비웃었습니다. “한국 땅에 그렇게도 인물이 없느냐?” 하면서.. 저의 교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추앙을 받았다면, “같은 바닥에서도 그들은 그렇게 노력하며 성장했구나! 나는 뭘 했는가?” 하면서 그들을 존경하고, 저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의 옛날 모습을 회상하면서 그들을 깎아 내리려고 하는 제 모습이, 그게 뭡니까?

2천 년 전에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 살던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엄청난 행운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이웃에 두고 언제든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서귀포에서 피난살이를 했습니다. 열 살 때였습니다. 하루는 혼자 천지연폭포 입구 길에서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베레모를 쓴 한 아저씨가 스케치 노트를 들고서 풀을 뜯고 있는 조랑말 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어깨 너머로 그림을 보고 싶어서 자꾸만 접근했습니다. 그 아저씨는 절 더러 바위에 걸터앉으라고 했습니다. 저를 그려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더라면, 그 위대한 화가 이중섭 씨의 그림을 소장할 뻔했습니다.

바로 곁에 둔 사람일수록 몰라보게 마련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구약성서배경사, 신약성서배경사, 중간기배경사, 이런 것들을 배우면서 저는 점 점 더 예수님의 구세주로서의 위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알면 알수록, 예수님의 교훈은 알면 알수록, 그분이 나의 주님이 되는 일과는 상관없는 일로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저는 미처 몰랐습니다.

목수의 아들이 갑자기 한 무리의 제자들과 함께 고향 땅에 나타났을 때, 나사렛 사람들의 의아한 표정을 우리는 눈으로 보는 듯하지 않습니까? 그가 손을 얹어 병자를 낫게 하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응시하며, 나사렛까지 따라온 무리들을 보면서, “목수가 나무나 깎으시지!” 이렇게 비웃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을 보며, 친분이 오히려 믿음에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 할머니처럼, 주님에 관한 얼마 안 되는 지식과 말씀을 들었더라도, 하나님의 신격을 알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사는 은혜를 입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주 하나님이시여, 저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한 없이 낮아지시고, 저희 인간들의 이웃까지 되어 주셨나이다. 하나님의 섬기심, 하나님의 사랑에 저희가 감복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 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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