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주제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창세기 45장 1-5절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시종들 앞에서 그만 모두들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요셉은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으나,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50장 15-21절 :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여, 그들에게서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요셉에게 전갈을 보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이 말을 전해 듣고서 울었다. 곧 이어서 요셉의 형들이 직접 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이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다.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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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는 우주가 창조되던 때로부터 노아의 홍수가 있기까지의 역사를 10개 장에 걸쳐 서술한 다음, 족장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제4대 족장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로 끝맺습니다. 그런데 족장 요셉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고 있는 열 두 지파의 선조인 열 두 형제들의 화해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던 날의 광경(창45)을 읽으면서 눈물을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원수 지을 사이가 아닌 관계에서, 그 관계를 송두리째 깨버린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관계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어야 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서두는 하나님을 배반한 아담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배반한 인간과 더불어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편에서 애쓰는 모습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부실합니다. 그런 무심한 인간에게 요셉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려는 것은, 배반을 당한 자(하나님)의 입장에서, 용서하는 쪽의 심정을 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목숨을 거두자, 형들이 다시 요셉에게로 달려와, 아버지의 유언을 외우며, 목숨을 구걸할 때에, 요셉의 마음이 아픕니다. 아직도 자기의 용서를 믿고 있지 않는 형들을 바라보는 심경이 어떠했겠습니까? 하지만, 다시 한 번 용서를 확인시켜 줍니다. “내가 당신들의 자녀까지도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흡사,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어도, 그 죽으심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실 길을 마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사와도 비슷한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세계민의 용서로 확대되고, 이로써, 온 인류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자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이며, 우리 기독교의 목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형제의 화해는 배웠어도, 이를 이방민족과의 화해에까지 확대하지 못한 어리석은 민족으로 살아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민족과 민족은 서로 화해를 할 줄 모르고, 서로 속이며, 서로 빼앗고, 서로 죽이는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용서를 위해 시작되었고, 용서를 위해 있습니다.

<기도> 용서의 하나님, 저희도 용서의 사람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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