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 사이의 우정

<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1) 사무엘상 20장 42절 : 그러자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잘 가게. 우리가 서로 주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잊지 않도록 하세. 주님께서 나와 자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나의 작전과 자네의 자손 사이에서도, 길이길이 그 증인이 되실 걸세.” 다윗은 일어나 길을 떠났고, 요나단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

다윗과 요나단, 한 사람은 왕자이고, 또 한 사람은 차기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원수가 될 운명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끝까지 우의를 버리지 않습니다. 가식으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맺어진 우정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우정이 가능했겠습니까? 그들의 위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왕은 아들을 향해, “멍청이 바보 자식”이라고 할 분위기이지만, 요나단에게는 아버지 사울보다 더 위에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우정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2) 사도행전 13장 2절 :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려 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보냈다.

바나바와 사울(바울)은 안디옥교회가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이방인들에게 파송한 선교팀입니다. 두 사람은 그들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두번째 선교여행 때에는 이 두 사람이 갈라서고 맙니다. 바나바가 그의 조카인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끝까지 고집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행15:36-40).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우정은 깨진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용서와 화해로 더 굳센 우의로 다져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갇혔을 적에 마가와 함께 치렀고(골 4:10),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일하던 마가더러 “그는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 이라며 보고 싶어 좀 데려오라고 부릅니다(딤후4:11).

3) 오늘(7월 15일) 우리는 성인 보나벤투라(1221-1274)를 기념합니다. 그는 20대 초반에 프란시스파 수도원에 들어가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때에 중세기의 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학우로서 절친하게 지내면서, 이 우정이 평생 이어집니다.

나중에 그들은 신학논쟁에 휩싸여, 서로 견해의 차이로 원수가 될 뻔한 일도 있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깨어지지 않았고, 서로에게서 배우며 지내는 돈독한 우의를 지켜 나갔습니다.

흔히 학자들 사이에서는 학문적 차이로 상대를 ‘마귀 취급’(?)을 하는 예도 많이 있습니다마는, 이 두 사람에게서 진정한 우의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마태복음 11장 28-30절 :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 본문에서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율법주의자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봅니다. 물론 인생살이에 시달리는 사람, 박해 하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생하는 사람들이 제외된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쉼과 평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들이 사람들에게 지우는 짐, 곧 율법의 실천조항들과 선행의 의무에서 해방됨을 뜻합니다. 대신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신뢰하는 믿음’을 권유하시고 계십니다.

29-30절의 “내 멍에”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경쟁적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목표량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생결단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성실히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 사이의 우정은 아름답고 영원합니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저희에게 복음전파에 헌신한 동지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서로 도우며, 서로 격려하고, 저희들의 관계가 아름답고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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