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출애굽기 12장 37-39, 42절 :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으로 갔는데, 딸린 아이들 외에, 장정만 해도 육십만 가량이 되었다. 그 밖에도 다른 여러 민족들이 많이 그들을 따라 나섰고, 양과 소 등 수많은 집짐승 떼가 그들을 따랐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부풀지 않은 빵 반죽으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구워야 하였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급히 쫓겨 나왔으므로, 먹거리를 장만할 겨를이 없었다. … 그 날 밤에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면서 지켜 주셨으므로, 그 밤은 ‘주님의 밤’이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밤새워 지켜야 하는 밤이 되었다. (새번역)
성경에서 출애굽 당시의 기록을 읽고 있노라면, 저는 71년 전, 제 집안이 평양을 빠져 나오던 날이 회상됩니다. 그때 저는 어렸어도, 그 즈음의 일들은 잊히지가 않습니다. 한 번 메모를 해 볼까요?
<D-1일>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해 김장을 담글 의논을 하시다가, 그 예산으로 시장에 나가서, 저희 다섯 형제의 겨울옷을 모두 사 입히셨습니다. 철없는 저희들은 새 옷을 입었다고 신바람이 났습니다.
<D일> 아침 식사 후, 저희 가족은 할머니(당시 72세)를 큰집에 부탁하고, 하직 인사를 드리면서, 서울까지 피난 갔다가 한 달 정도 지나면 돌아올 것이라며 떠났습니다. 저희 집은 평양 ‘서문밖‘이었습니다. 형(11세)과 저(9세), 그리고 동생(7살)은 걷고, 네 살 짜리 동생은 아버지가, 한 살 짜리 동생은 어머니가 업었습니다.
대동교를 건너려니까, 유엔군 보초들이 못 건너가게 막았습니다. 아버지가 사정을 좀 해 보려고 가까이 다가가려니까, 총으로 위협사격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상류 쪽 능라도에 유엔군이 설치한 군사용 부교가 있다고 해서, 그리로 건너갈 수 있는가 가 보자 하고, 강변길을 걸어 부교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전방에서 군 장비차들이 열 지어 철수하고 있어서, 건널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비차들 사이로 한 사람 씩 이리 저리로 트비면서 간신히 강을 건넜습니다.
강 건너편 선교리에 사는 작은아버지 집으로 갔습니다. 이제 남한의 국방군이 진주해서, 공장(제분)도 새로 손질하고,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려는데, 무슨 피난인가며 형제끼리 심각하게 의논을 하더니, 마침내 아버지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하루 밤을 지내고 함께 피난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D+1일> 이른 새벽에 대동강 강변에서 소총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그칠 줄을 모릅니다. 이미 중공군이 평양까지 들어와서 시가지 전투가 벌어진 줄 알고, 아버지는 몹시 낙망했습니다. 그러나 한참 후에 수류탄이 폭발하는 소리가 나고, 더 지나니까, 큰 포탄이 펑, 펑, 터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유엔군이 평양에서 퇴각하기 위해 탄약고에 기름을 붓고 태워 모두 폭발시키는 것인 줄을 아버지는 알아차렸습니다. 그 요란한 소리에 평양 시민들은, 대부분 아침이 밝으면 피난을 떠나기로 작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 작은어머니는 당시에 만삭이어서 저희와 속도를 맞출 수가 없어 그 온 가족이 뒤로 떨어졌는데, 마침내 사리원까지 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 가더라고 나중에 다른 분에게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그날 눈벌판을 걸어서 중화를 거쳐 황주까지 도착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중화의 한 농가에 들렀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 집 사람들도 피난을 떠난 것 같았습니다. 아직 부뚜막이 따뜻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쌀독에서 쌀을 꺼내 쉽게 한 끼 밥을 해 먹고 나왔습니다.
이렇게 황주, 사리원으로, 다시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크신 손길로 인도함을 받아, 개성을 거쳐 서울에 당도하니, 서울에서도 피난을 떠나느라고 야단이었습니다.
이튿날 수원에 도착했더니, 역전 동네가 전쟁중에 폭격으로 허허벌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기동력이 약한 것을 걱정해서, 형만 데리고 부산으로 일단 피난했다가, 전쟁 끝나기까지 어머니 혼자서 어린 네 형제를 맡아, 힘든대로 지내다가, 다시 만나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우셨습니다. “죽어도 난 따라갈래요.” 이리하여 저희 집 일곱 식구는 흩어지지 않은 채로 피난을 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구, 부산 다대포를 거쳐, 제주도 서귀포로 가서 편안히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제가 이 모든 일을 기억하는 것은, 너무도 고생스럽고 무서운 기억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떠나던 날의 기억을 대를 물려가면서 하고 있었던 이유와 꼭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이념 때문에 동족을 맘대로 죽이는 일이 다시 없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기억은 저의 당대 만이 아니고, 대를 물려서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저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많이 고생하고, 많이 경험하는 가운데 저희의 영원한 처소에 들어가도록 믿음 훈련을 시키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저희의 생이 끝날 때에 저희의 믿음 훈련도 완결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