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고린도후서 5장 14-17절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새번역)
성경이 소개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그 캐릭터를 설명하기가 좀 까다롭습니다. 흔히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영화에는 응당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하기 마련인데, 아주 박색을 쓰지는 않습니다. 신경성 질환자의 인상을 풍기는 인물을 씁니다. 거기까지는 좋지만, 다만 그에게는 ‘새 사람’으로 사는 인상을 주는 연기를 주문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그에게는 ‘기쁨이 떠나지 않는 조용한 표정’을 요구하면 좋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옛 사람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은, 옛 가치관, 옛 질병, 옛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들에 묶여 종살이를 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그 모든 묶임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유로운 사람, 소망에 넘치는 사람, 그래서 기쁨의 근원이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사람(눅8:2)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일곱 귀신을 모두 내어쫓아 주셨습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다분히 질병이 있었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니까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정신신경과 질환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말하자면, 젊은 나이에 이미 정신이 황폐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막달라 마리아를 성하게 고쳐 주신 은혜는, 그의 후반 생애를 전적으로 예수님을 위해 바치기로 작정했던 데에서 그 증거를 봅니다. 누가복음 8장 1-3절에 열거된 주님을 따르던 무리 중에 있었던 여인들의 이름은 주님의 ‘여제자’의 일부를 소개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새 사람’이 되면, 예수님께 헌신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예수님 일행이 가는 곳마다 가장 힘든 수고를 도맡아 행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수난 당하시던 때, 대부분 제자들이 모두 도망친 때에도, 십자가 처형장까지 다른 여제자들과 함께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무덤 가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막달라 마리아’의 후예들이 교회를 떠받들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회중석에 앉아 있는 무리들 가운데 예배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분들입니다. 주님을 향한 통회에 있어서, 주님을 향한 감사에 있어서, 주님을 향한 헌신에 있어서, 주님을 향한 실천력에 있어서 적극적인 ‘열심파’ 신자들이 바로 이분들입니다.
오늘 막달라 마리아 기념일을 맞아, 2천 년 전의 막달라 마리아와 그의 후예들을 기억하고, 본 받으며 지내면 좋겠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헌신자들의 사표로 막달라 마리아를 세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크신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기쁘게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