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태복음 20장 20-23절 :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와서 절하며, 무엇인가를 청하였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선생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마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정말로 너희는 나의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히는 그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는 내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새번역)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에 하신 일이 제자들을 부르신 일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는, 베드로와 안드레 두 형제를 부르시던 같은 시기에, 역시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살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도 부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어부였습니다.
그는 늘 예수님을 수행하던 열 두 제자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상황에서는 세 제자, 곧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따로 불러 함께 동행했습니다. 변화산상의 일이라든지,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기도하시던 때에 이 세 사람과 함께 계셨습니다 (마17:1-9, 26:36- 46).
그러면 인간 역사의 주인공들이, 이만큼 자기 측근에게 자기의 귀한 이벤트 자리에 함께 있게 해 주었다면, 이미 ‘거사 후 중용’은 약속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중용을, 그의 어머니 살로메가 이토록 욕심을 내고 있었을까요?
말하자면, 이윽고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최고권력자인 대제사장과 맞대결하는 양상도 뚜렷해졌고, 그들을 거꾸러뜨리는 일은 예수님의 능력이면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간단한 일로 보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왕위에 오르실 일이 눈 앞에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만 제끼면, 자기 두 아들 만이 중용의 문턱에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오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장차의 운명이 분명히 내다보였을 것입니다. 야고보가 주님의 교회, 즉 예루살렘교회를 지키다가 분봉왕 헤롯 아그립바의 칼날에 목을 베여 죽게 될 것도 보였을 것이고, 요한이 밧모 섬에서 일생을 마칠 일을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기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왕위에 오를 일, 자기 아들들이 중용될 일에만 집착하고 있는 이 여인을 바라보시며 슬픈 생각에 잠기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들의 자녀와 손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살로메의 기도와는 다른,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시는지요?
예수님의 사적을 기록하는 복음서 속에서, 이 가련한 여인의 그릇된 행각을 기록으로 남겨 두신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계획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일의 경중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위해 비는 것이, 우리들의 자녀들을 위한 기도여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받는 교훈입니다.
야고보는 주후 44년,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10여년 이후에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그때까지 그의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그 처형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너희는 나의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히는 그 일은, … 내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오늘은 사도 야고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저는, 저 자신의 앞날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시든지 간에, 순종하기를 기도하렵니다.
<기도> 저희의 모든 기도를 경청하고 계신 하나님, 저희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기도이기를 빕니다. 헛된 것을 빌지 않게 하시고, 특별히 저희들의 자녀, 손자녀들을 위해 비는 기도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