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사도행전 20장 17-18, 21-24, 28, 32 :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불렀다. 장로들이 오니,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 “나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똑같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과 우리 주 예수를 믿을 것을, 엄숙히 증언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 뿐인데, 어느 도시에 가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업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새번역) >
삼국지를 읽는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제갈공명의 출사표편을 읽습니다. 당시 위, 오, 촉, 삼국의 역대의 맹장들은 대부분 죽고, 제갈공명이 남아서, 그의 소시적부터의 꿈인 한 나라 왕실의 회복을 위해, 나약한 군사들을 이끌고 강대한 위 나라를 치러 출군하던 때에, 그의 임금에게 유언으로 남긴 글, ‘출사표’를 읽으면서 눈물을 많이 흘립니다. 인간이 한 세상 살면서 이런 사명감과, 사명에 대한 충성심을 가진다면, 얼마나 고결한 삶이겠느냐, 하는 감동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일깨우심으로, 자신이 가는 곳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유대인들이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아성인 예루살렘으로, 결전을 치르러 떠납니다. 인간적인 자신감으로 그가 가는 것이 아니라, 사명감에 불타서, 죽음을 각오하고 가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떠나던 곳은 지금의 터키의 서부 해안에 있는 밀레도였습니다. 북쪽으로 하룻 길인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서, 교회의 장로들을 오라 했습니다. 그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의 ‘출사표’를 한 고별사로 전합니다.
‘장로’로 불리우는 사람들은 회중 앞에서 목회자와 설교자로 일하는 이들을 말하지만, 때로는 오늘 본문에서처럼 ‘감독’(주교에 해당)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그 지역 일대의 교회들의 지도자가 되는 이들이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 자신이, 탄압자들의 본부, 예루살렘으로 갈 결심을 했다고 선언합니다. 물론 100% 죽음이 그를 기다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을 자처하던 사도 바울로서는, 자신이 죽을 곳이 다만 예루살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곳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곳이요, 무덤에서 부활하신 곳이며, 이로써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죽는 순간까지 그가 예루살렘에서 할 일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 밖에 없다고 그의 각오를 말합니다.
너무도 단호하고도 장엄하게 그의 결심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은 바울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지극정성으로 섬긴 교회들을 ‘사나운 이리’에게서 지켜 주기를 당부합니다. 이것은 박해자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목회서신에서 보듯이, ‘거짓 교사들’(딤전1:19-20, 4:1-3 등), 즉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을 의미했던 것으로 봅니다. ‘복음이면 다다’ 라고 해야 하는데, 또 다시 율법의 굴레를 씌우려 하는 자들의 위협이 어느 때, 어느 곳에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은 예측했던대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고, 총독에게 고소를 당해, 바울이 로마시민권자이므로, 결국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압송 당하게 됩니다. 이것을 미리 내다보면서 바울이 예루살렘 여행을 계획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바울을 암살하지 않고서는 밥도 먹지 않겠다(행23:21)”는 사람들이 우글우글했던 예루살렘을 자진해서 갔던 바울이 그런 계략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만사를 정치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정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가기 전에 먼저 갈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어떤 준비를 하십니까? 그런 건 준비 안 해도 된다고요?
하지만 밀레도에서의 바울의 일을 보면, 우리도 죽음을 앞에 두고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간 ‘복음의 동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죽고 싶다는 희망, 섬기던 교회와 섬기던 교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들, 이런 것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당신을 맡깁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이것이 바울의 고별사의 마지막 인사들이었습니다.
<기도> 주님, 저희들에게도 죽음의 날이 올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빕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만한 곳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위해 자신의 말년을 대비했던 바울을 본받게 해 주시옵소서. 바울의 유언처럼 교회중심적 유언을 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