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태복음 18장 10-14절 :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새번역)
제가 어렸던 때에, 이 본문을 두고, 목사님이신 아버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 왜 양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었을까요? 맹수가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해치면 어떻게 하지요?” 꽤나 똑똑한 체하며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대답을 안 하시고, 웃기만 하셨습니다. 제 질문이 아버지를 당황하게 만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제가 잃은 양으로 살기도 했던 경험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목자가 양 아흔아홉 마리를 산판에다 남겨 둔 채로 잃은 양을 찾아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대단치 않게 생각해서도 아니고, 산판에 맹수의 위험이 없어서도 아니고, 잃은 양의 안타까운 사정을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것입니다.
찬송가 하나는 “양 아흔아홉 마리는 우리에 있으나”로 성경본문을 변조해서 ‘우리에’ 즉 안전한 곳에 있기 때문에, 염려 없게 만든 후에 목자가 잃은 양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변조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에 대한 큰 배려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오리지널이 ‘잃은 양’에 대한 끓는 애정을 표현한 데 비해서 틀림없이, 약화된 느낌을 안 가질 수 없습니다.
한 마리 잃은 양이 저 자신인 것을 몰랐을 때에야,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위태로운 형편을 걱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 잃은 양이, 그 누구도 아니고 저 자신이라는 ‘주제파악’을 하고 나면, 본문을 읽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지금 ‘담 안’에 살고 있는 수감자 분들이나, 원치 않는 곳에서 살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면서, 또는 폭력에 매일 시달리면서 살고 있는 이들, 학정 속에 살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잃은 양’이라고 보는 것도 맞습니다. 그들을 찾아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데려 내와야 합니다.
그러나, 드넓은 세상 속에 담 없이 갇혀 사는 사람들, 남모르게 마귀에게 시달림을 받고 있는 영혼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양 한 마리가 우리에 남아 있고, 아흔아홉 마리는 모두 산판에서 길 잃고 헤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 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바라시는 선한 목자이신 줄 믿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제가 주님의 품으로 확실히 돌아오게 하시며, 길 잃은 양들을 찾는 일에 부분적으로나마 성실히 도움이 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