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마가복음 10장 19-25절 :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새번역) >
이 말씀을 읽으면서 자연히 떠오르는 질문은, “나는 부자인가, 아닌가?” 입니다. 전에는 자신있게 “아니니까 다행이다.” 했지마는, 지금은 “글쎄요.” 입니다. 고등교육을 받고, 비록 은퇴는 했지만, 아파트에서 삼 때 밥을 먹으며 살고, 아직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다면, 세계에서 잘 사는 10% 이내의 등급의 사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락없이, 저는 바늘귀로 통과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놓인 것입니다. 비상대책, 한참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1953년 부산대화재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집 없이 겨울을 나야 했던 시절에, 대청동 국제시장 길목에 한 갓난아기가 버려졌습니다. 사람들이 떼로 몰려 들어 혀를 차면서 갓난아이를 동정했습니다. 갓난아이는 목이 쉰 소리로 ‘박 박’ 울어댔습니다.
그때, 한 중국인 여자가 “엄마가 없으면, 제가 데려다 키우겠어요.” 라며 그 갓난아이를 데려 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 마음에는 “중국인들은 생명을 사랑하는 백성이다.” 라고 입력이 되어 있습니다.
10여년 전부터 제가 중국을 드나들며 사귄 한 친한 친구가 있는데, 그 분은 자신이 가난하면서도,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을 데려다가 자기 호적에 올리고 살고 있습니다.
제 친구 한 사람은 월드비전을 통해서 열 세 명의 국내외 결연아동들의 급식과 학업을 돕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주택연금으로 살아가면서도 그들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 중국인에게 어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가 최근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새 아파트에 입주할 기간이 남았는데도 살던 집을 비워야 해서, 한 달 동안 대기하려고, 값싼 주택에서 살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한국에도 밥을 굶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직접 보고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눈에 띄지 않는다고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며 들려 준 말씀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때에 눈 덮인 언덕길로 피난민 행렬에 끼여 부모님을 따라 힘겹게 걷던 제가, 후퇴하고 있는 한 ‘스리쿼터’ 유엔군 차량이 도로가 막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리쿼터 위에는 추워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저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저에게 손짓을 했습니다. 가까이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갔더니, 그가 방금 뜯어서 먹던 과자 박스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라이프 세이버’라는 드롭스였습니다. 맛도 희한한 그 드롭스가, 말 그대로 굶주린 저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부자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기보다, 부자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을 재음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 만이 중요합니다.”(공동번역)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
<기도> 사랑의 하나님, 저희도 실천하는 사랑으로 하늘나라를 미리 맛보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