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골로새서 1장 24절 :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파하게 하시려고 내게 맡기신 사명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 비밀은 영원 전부터 모든 세대에게 감추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 성도들에게 드러났습니다. (새번역)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로서 만민의 죄를 사하신 십자가였습니다. 실은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우리들이 당해야 할 죽음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일체의 활동을, 우리는 ‘복음전도’라고 말합니다.
‘복음전도’의 선봉에 섰던 사도 바울이, ‘복음전도’를 위해 온갖 수고를 사양치 않았습니다. 얼마나 수고했는지를 복습해 봅시다. 그의 ‘자술서’(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의하면,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했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이만큼 복음전도를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정말 고개가 숙여지는 바울의 간증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 =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면, 이 복음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감당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명명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고난을 자청할 사람을 바울이 찾고 있었던 것이고, 바울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물론 ‘십자가’는 자청해서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박해자에 의해서 지게 되는 것인데, 박해를 당할 각오로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이지요.
여자가 해산의 수고를 하려고 결혼식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요. 한 남자와 함께 영원히 사랑하며 살기로 약속하려고 결혼식장에 들어간 결과로, 해산의 수고도 하게 되는 것이고, 부-모 둘이서 양육의 모진 수고도 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끌려 들지 않고는, 예수님의 삶에 매료되지 않고는, 하나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겠지요.
<기도> 예수님의 삶을 닮은 저의 삶이, 어느 한 구석, 조금이라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저의 이기성은 소멸되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삶을 따르는, 저의 삶이 되도록, 진정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