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요한복음 3장 16-17절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개정개역)
인간의 역사를 무기의 역사로 푸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인류가 무기로 맨 먼저 돌을 집어 들었다고 합니다. 그후 돌에서 창칼로, 창칼에서 활로, 활에서 총으로, 총에서 대포로, 대포에서 폭탄으로, 폭탄에서 핵무기로, 이렇게 무기가 발달해 오면서, 인류사회는 점점 더 못살 세상으로 변해 왔다고 합니다.
한번은 영국의 어느 옛날 제후의 집을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하는 곳이 있어서 구경을 갔습니다. 그의 집 지하층은 범법자들의 감옥과 고문실이었습니다. 범법자들이라기보다 제후의 눈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처형하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제후가 사용하던 고문과 처형 도구들을 보면 정말 인간이 이토록 잔혹할 수가 있을까, 치가 떨렸습니다.
한 고문 기구는 산 채로 매 놓고 피부를 벗기는 도구까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김옥균이 받았던 능지처참형(산채로 살을 조금씩 도려내어 여러 날 동안 죽이는 처형)과 유사하다고 느꼈습니다.
오래 전에 방영된 사극 ‘허균 전’에서 그가 사형을 당하던 ‘오체분시형(거열형)’을 실감있게 본 적이 있습니다. 허균의 사지와 목을 밧줄로 묶어 그 다섯 개의 밧줄을 다섯 마리의 황소가 동시에 끌게 하는 것이 그 처형법인데, 그 결과는 보여 주지 않지만 가히 짐작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세상에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러 오실 때에, 인간에게 배척을 당하셔서 극형에 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으면서도,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처형의 방법이 인류 구원의 방법이 되실 것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려서부터 십자가를 향하여 자라나셨고, 그의 공생애도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걸으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오랜 시간의 진통 끝에 죽도록 고안한 사형방법입니다. 고통을 당할대로 당하고, 조금씩 출혈하고, 기운이 다해서 죽는 것입니다. 이 무자비한 처형을, 우리의 사랑하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입니다. 너무도 익숙하게 보아 왔기 때문에 이제는, ‘또 십자가구나’ 하는 정도로 무감각해지고 말았지만, ‘오체분시형’이나 ‘능지처참형’ 못지 않은 인간의 잔인성이 나타나 있는 처형법입니다.
4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후에, 그의 모친 헬레나가 성지를 방문하여 예수님께서 달리셨던 형틀로 알려진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기념하는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614년에 페르시아가 침략했을 때, 이 십자가가 귀물인 줄을 알고 훔쳐 갔습니다. 그러나 15년 후에 동로마가 페르시아에 쳐들어가서 이것을 빼앗아 왔습니다. 그 십자가를 갈보리언덕으로 다시 모셔 올 때에, 황제 헤라클레우스는 황제의 의상을 벗어서, 최고의 예를 갖추어, 십자가 앞에 충성할 것을 표했다고 합니다.
이때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초라하며, 치욕스런 십자가의 형상을, 세상의 모든 권세 위에 모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지금껏 우리들의 신앙의 중심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오늘은 십자가 표상의 기념일입니다.
<기도> 세상이 십자가형으로 죽인 예수님, 제가 제 마음에서 오랫동안 거절했던 주님께서, 세상의 구세주이신 줄을 알게 된 이래로, 저의 생각의 중심에, 저의 삶의 중심에, 십자가를 두고, 주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사랑이심을 늘 예배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가 저의 생각과 삶을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