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창세기 2장 23-24절 :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개역개정)
제가 유년주일학교 다닐 때에, 어느 날 이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저는 슬며시 제 가슴팍을 만져 보았습니다. 혹시 갈빗대 빠진 자리가 있나 하고요. 배 있는 쪽으로 갈빗대가 부러져 나간 자리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 가슴에서는 하나 만이 아니고 여러 개를 꺾어 내셨구나 하며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말씀은, 그런 해부학적인 말씀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부부가 한 몸임을, 부부가 모든 인간관계, 즉 어떤 친구관계보다, 형제, 아니 부모-자식 관계보다 더 가까와야 할 관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담을 위해서 두 명의 하와를 만들지도 않으셨고, 하와를 만들기 위해서 두 명의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한 아담과 한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의 결합으로 가정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히브리어로, 남자를 ‘이쉬’ 라고 합니다. 거기에 여성명사를 만들 때의 어미 ‘야’를 붙여, 여자를 ‘잇샤’ 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계보에 속하는, 한 생명체라는 것을 뜻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아들이 결혼을 하면, 부모에게서 떠나 살면서도, 부모의 집 근처에 살았습니다. 이것은 자기 아내를 양가 부모의 제약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기도 하며, 부모가 관리하던 땅을 장차 물려 받을 준비를 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의 절정은 부부의 성적 합일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짝지어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후로 세상에 태어나, 자라고, 혼인하게 되는 모든 남녀에게, 결혼으로 새로운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원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모든 가정들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이 서로 만나,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복된 곳입니다.
제 부모님께서는 1939년에 결혼하시고, 26년간 교회 일을 하셨습니다. 1964년, 은혼을 기해서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에게 드리는 ‘은혼에 부치는 노래’ 라는 시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작곡 공부하던 동생이 그 시로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이것이 저희 집의 주제곡이 되었습니다.
“정녕 그대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었기에 / 우리가 한 몸 아니요? / 정녕 한 몸이기에 이십 오 년 긴 날들 / 수유 안 떨어지고 고생을 견디었지요. / 가난의 세찬 끌이 사뭇 쪼아댔기에 / 동철 이마이마에 주름이 줄지었구려. /
그러나 보라, 두만강 굽이치는 끝에서 정방포 떨어지는 남해까지 / 겨레의 순결한 마음밭에 / 또렷또렷 우리 발자국이 꽃무늬인 양 새겨진 것을 / 그대여 우리 서로 지팡이 되어 머나먼 길 걸었거니 … 지나간 사 반 백년 우리는 부평초였던가? / 길 잃은 유랑민이었던가? /
그래도 좋아, 잿더미도 보금자리 / 죽는 고비도 웃고 넘었거니 / 사랑의 샘이 솟는다면, 사막도 오아시스 / 지옥도 꽃동산이었지 /
아, 그대여, 우리 이미 반백이 넘었구려 / 등걸에 새 가지가 타닥타닥 / 내일을 위한 꿈들을 피웠구려 / 굵직한 열매가 다 익기 전에 우리 부디 살고 지고 / 늙지 말고 살고 지고 /
정녕 우리는 조물주가 짝지어 준 /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었기에 / 우리는 길이 복스러웠지 / 우리는 길이 사랑만 했지”
이것이 저희 부모님이 ‘믿음’ 이라는 유산과 함께 저희에게 물려 주신,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값비싼 ‘가보’입니다.
이 은혼식이 있었던 이듬해,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중풍에 쓰러지셨고, 와병 중에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기도> 사랑의 주 하나님, 저희에게 가정이라는 복된 곳을 주셔서, 여기서 저희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들과 함께 살아가게 하시고, 비록 이 땅에 살아도 하늘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저희의 모든 가정 위에 복을 베푸사, 주 하나님을 모신, 사랑과 믿음과 소망의 가정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